2005.1 | [문화칼럼]
고급예술이 무어냐고 묻거든
홍영주 서울청소년문화교류센터 문화사업팀장(2005-01-07 17:34:20)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종종 접하는 ‘좋은(good)’ 예술은 대개 ‘고급예술(high arts)’의 이음동의어이며, 종종 '엘리트예술(elite arts)'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서 ‘일류예술’, ‘명품예술’이라는 듣기 거북한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좋은 예술의 최상급을 지칭한다. 이 좋은 예술에는 대개 서구에서 들여온 진지한 연극과 오페라, 고전음악, 무용 등과 같은 단골메뉴 외에 화자(話者)의 문화적 취향에 따라 몇몇 장르가 추가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름이 알려진 몇몇 서구의 문화연구자들은 고급예술 중심의 배타적인 기준에 의하여 대중문화가 ‘좋은’ 문화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고 부당하게 배척받았다고 분개하지만 서구의 근대화를 모방하느라 숨가빴던 우리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이 하나 더 추가된다. ‘좋은’ 예술은 서구에서 이미 견고하게 짜놓은 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전통예술은 언제까지나 좋은 예술, 엘리트예술, 고급예술의 범주에서 제외된, 별개의 것으로 다루어진다는 것이다.
공통된 특성을 가진 사물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사고하는 사람들의 습성을 살펴보면 좋은 예술과 좋지 않은 예술, 고급예술과 저급예술, 엘리트예술과 대중예술, 순수예술과 비순수예술간의 경계선이 명확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경계선이 애매해서 비평가들이나 문화예술인들이 “예술이다”, “예술이 아니다”라고 열띤 논쟁을 벌여도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의 사고체계에서 전통예술은 앞에서 언급한 그 어느 집단에도 소속되지 않는 제3의 예술범주로서, 이 불분명한 이분법에서도 벗어나 우리의 뇌에서 독자적이면서도 고립된 인지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예술담론도 마찬가지인데 ‘연극, 음악, 미술, 국악 등등’처럼 국악은 음악이지만 음악과 구별된다.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예술 자료들을 분류할 때나 지원사업 분야를 명시할 때에도 ‘음악, 무용, 연극, 문학, 미술, 전통예술 등’과 같이 ‘전통예술’은 음악, 무용, 연극과 별개의 것으로 뭉뚱그려 구분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하게 보면 마당극이 전통예술에서 분가하여 연극에 편입되어 있을 때도 있고, 서예도 간간히 전통예술의 그늘에서 벗어나 미술의 한 식솔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모양새가 ‘연극, 마당극’ 또는 ‘미술(서예 포함)’에서처럼 부자연스럽고 좀 억지스럽다는 인상을 준다.
예술이면서도 다른 예술과 같이 동등하게 다루어지지 않는 전통예술에 대한 담론은 일상생활에서나 학계에서나 비슷한 양태로 전개된다. 아래의 글은 어느 세미나에서 발표된 글의 일부인데, 이 글에서 보듯이 ‘전통예술’과 ‘고급예술’, 또 ‘전통예술인’과 ‘고급예술인’과 같이 굳이 분리하여 반복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통하여 전통예술이 고급예술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는 동시에 현대의 미의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전통예술의 고답성을 질타하는 언어의 이중성은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고급한 문화와 예술이나 전통문화예술이 대중화되고 미디어문화로 수용되는데에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전자 매체와 같은 대중 미디어는 예술적으로 고급스럽지 못하다는 인식으로 텔레비젼문화나 대중문화로 변형되기를 꺼려하였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고급예술인이나 전통문화예술인들은 문화예술이 고급스러운 그리고 전통문화의 원형이 그대로 보전되는 데에 더 관심을 가져왔다. 그래서 전통문화예술의 원형보존에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을지라도 전통문화와 예술은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고 격리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학자들이 고급예술과 전통예술의 분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의 여가문화를 연구한 사회학자 김문겸이 지적한 것처럼 “갑오경장을 계기로 전통적인 한학 지식인층이 일거에 정치무대로부터 폭력적으로 배제되기 시작함에 따라, 전통적인 상층 지배계급의 일반문화도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하고 거기에는 급격한 문화적 공백이 생기면서” 서구의 문물들이 그 공백을 채우게 된 역사적 배경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문화적 공백은 무속인들과 같이 하층계층들에 의해 계승된 민속예술을 거세하는 물리적 제거를 동반했으니, 이 연장선에서 전통예술에 대한 우리의 특별한(?) 인식과 언어습관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지금 전통예술에 대한 막연한 책임감, 또는 세계무대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다는 예술성을 환기시켜 서구 중심의 좋은 예술에서 밀려난 전통예술의 위상을 회복시키자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근대화를 향한 열망이 절박했기 때문에 전통과의 단절을 선택한 후발근대국가가 뒤늦게야 자국의 전통예술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보호하는 데 급급하여 이들을 ‘전통예술’이라고 이름붙인 울타리 안에 집어넣고 예술시장의 경쟁에서 완패되지 않게 격리시킨 것만도 다행인데, 전통예술도 고급예술이 될 수 있다는 인지적 노력에까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한다면 무리일 게다. 그런데 이 글은 그 무리수를 어떻게 두어야 할지 끙끙거리고 있는 중이다.
돌이켜 보면 전통예술이 예술 그 자체로 감동을 주기보다는 민족정서를 건드리는 상황에서 위력을 발휘했듯이 고급예술 또한 예술 그 자체보다 그 주변정황의 고급스러움에 압도당한 경험이 더 많았다. 어쩌다가 뜻하지 않게 사물놀이를 접할 때 “이 시끄러운 소리는 우리의 소리다. 우리 민족의 소리다. 우리의 가락이다“ 최면을 걸으면서 어울려 보기도 했고, 전통예술의 고달픈 길을 계승한 이들의 외로운 노후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인간극장 스타일의 TV프로그램이나 기사라도 보게 되면 전통예술의 예술성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도 삼가게 되었다.
고급예술의 고급스런 분위기에는 전통예술의 그것보다 더 빈번하게 노출되었다. 특히 어려운 환경에서 성장했으나 미모와 고운 심성을 겸비한 젊은 여성이 신분의 차이로 인한 마음고생을 겪으면서 재벌2세와 사랑하게 된다는 TV드라마의 상투적인 극적 전개에는 두 연인이 공연장에서 클래식음악을 감상하는 장면이 종종 삽입된다. 공연을 보러 가는 내용 전후에는 항상 예기치 않는 사건이 터지고 등장인물들 간의 갈등이 증폭되는 서사 구조에 익숙한 시청자들은 클래식음악이 어느 특정한 집단들의 격조 있는 문화적 취향을 대표하는 장치로 전용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위치를 강화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반발하지 않는다. 그리고 왜 이 장면에서 예술의전당과 같은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오케스트라 공연 대신에 국립국악원의 장중한 정악 공연이 나오면 안되는 것인지 의아해 할 여지도 없이 우리는 방송에서 보여주는 고급예술의 클리세에 길들여진다.
전통예술이든 고급예술이든 양자 모두 우리의 주체적인 판단과 자율적인 감각이 작용하기 이전에 성립된 제도이며,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회적 학습을 거쳐 우리 세포에 반복적으로 입력된 정보이기 때문에 고급예술과 전통예술을 가르는 물리적, 인지적 틀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런데 앞으로도 전통예술은 전통예술로, 고급예술은 고급예술로 평행선을 그리다가 가끔 ‘크로스오버’라는 명목으로 잠깐동안 허락된 만남을 가지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예술은 진화하고 있는데 우리의 뇌는 기존의 언어와 틀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런 생각들이 뒷북치기나 쉰소리가 되지 않게 어떻게 포장해야 하는지 쉬이 결정하지 못한 과제들이 쌓여져만 간다. 새해 첫날이 시작되기 전부터.
홍영주 | 서울청소년문화교류센터 문화사업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 단국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조선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으며,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 마케팅전공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