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 | [서평]
풍화하는 것들을 위한 노래
이희중 시인ㆍ전주대교수(2005-01-07 14:19:34)
심재휘 시인의 첫 시집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부는』은 '바람'으로 채워져 있다. 여기서 '바람'은 시간 또는 세월의 다른 이름이다. 시간은 사물의 모습을 바꾼다. 시간이 사물의 세계를 바꾸는 속도는 아주 느리므로 명민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그 변화의 내막을 다 파악하기 어렵다. 산천은 의구하다고 했던가. 그렇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 바위도 부스러지고, 흙도 흘러내리고, 물길도 바뀐다. 산천이 예전과 다르지 않아 보이는 까닭은 그 변화가 장구한 시간에 걸쳐 아주 천천히 일어나는 것이라서, 고작 백년 정도 살다가는 우리들의 눈에 쉽게 들키지 않기 때문이다.
정작 시간에 따라 현격하게 변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살아가는 것들의 외양이다. 이야말로 시간의 파괴적인 속성을 잘 드러낸다. 살아 있는 것들은 우리들의 눈에 나날이 다르다. 갓난 아이의 보드라운 살결에 비하면 우리들의 피부는 얼마나 빠른 속도로 거칠어져 가는 것인가.
시간에 따른 사물의 변화를 우리는 '풍화(風化)'라고 부른다. 이 변화는 거의 예외 없이 점진적 마모와 해체의 과정이므로, 풍화는 사물이 소멸해 가는 원인이자 과정처럼 보인다. 사물과 풍화의 관계가 사실적이라면, 생물과 풍화의 관계는 그보다 은유적이다. 나무와 풀과 짐승과 사람은 바람으로 인해 가시적으로 손상되는 바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바람의 상징적 배후인 시간에 의해 제 몫의 삶을 소진한다. 그들은 궁극적으로 끝이 있는 삶을 살아간다. 모든 유기체는 풍화에 저항하는 일정한 기제를 내장하고 있으나 결국 풍화에 패배할 수밖에 없다.
심재휘의 시집에는 '풍경'과 '바람의 경치'가 또한 자주 눈에 띈다. '風景'이 곧 '바람의 경치'이므로 이 둘은 같은 말이다. 바람 자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공기 그 자체이거나 그 움직임이어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만연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람과 사물의 관계는 "들리시나요 당신의 지붕에서 나는 저 소리 / 잘 들어보세요 비에는 소리가 없지요 / 그건 비 맞는 세상이 내는 소리랍니다"(「아! 사바나의 빗소리」)에서 비와 소리의 관계처럼, 본질과 부수하는 현상의 관계를 이룬다. 바람은 보이지 않으나, 그것에 흔들리는, 심재휘의 방식대로 말하자면 그것에 마모되는 사물의 모습으로 가시화된다. 그러므로 그의 시가 풍경에 골몰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이 몸담은 사물의 현재를 관찰하는 의미와, 풍화하고 있는 사물을 응시하는 의미를 동시에 갖는다.
놀이터의 벚나무가 한 떼의 나뭇잎을 쏟는다
가지에 매달려 오래 바람에 시달렸던 나뭇잎들은
바람의 등을 자유롭게 미끄러지며 내려온다
-「북쪽 벽에 못을 박고」 부분
벚나무 잎새가 나무에 달려 있을 때 이를 괴롭히는 것도 바람이고, 잎새가 질 때 이를 거두는 것도 바람이다. 이처럼 바람으로 그려진 소멸과 풍화의 영상은 이 시집 곳곳에 있다. 풍경, 즉 바람의 경치 또는 풍화의 정경은 그래서 그의 시구에서, "시장 입구에서는 우체통이 선 채로 낡아갔고", "연기는 바람에 흩어지"고(「편지, 여관, 그리고 한평생」), "거실의 소파는 오직 낡기 위해 누워 있고"(「玄關, 그리고 벗어놓은 신발」), "보고싶은 사람들이 겉봉에서 낡아가고"(「폭설」), "꽃 그늘은 흉한 소문으로 점점 야위어가"고(「사월」), "눈 맞으며 손 흔들어주던 사랑도 이제는 쌓이고 녹고 하여 또 내일처럼 낡아간"(「자작나무 흰 몸」), 소멸과 쇠락의 풍경으로 포착된다. 이처럼 풍화로 인해 소멸해 가는 과정에 처한 사물들의 예리한 단면이라 할 현재의 풍경에서는 그러므로 관찰의 시각조차 소중하다. 그의 시 한켠에는 오전과 오후, 나아가서 오전 열 한 시, 오후 네 시 등의 꼬리표가 자주 붙는다.
심재휘의 시는 한편으로 기억에 의존한다. 기억은 시간의 풍화 앞에 선 우리를 우리답게 해 주는 정체성의 핵심이다. 치매라는 병이 잔인한 까닭은 그것이 우리의 기억을 놓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그저 먹고 싸고 번식하는 미물과 구별될 길이 없을 것이다. 시인은 풍경, 곧 풍화하는 사물들을 보며 현재의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과거의 내력을 반추한다. 때로 이 내력은 사물의 것일 때도 있지만, 대개는 그 사물에 엮인 시인의 기억이다. 이 시집에는 시에는 "오래된"이라는 수식어가 자주 나온다. 어떤 사물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외양을 통해 깨닫게 되기도 하지만, 그 사물의 과거를 내가 기억하기 때문에 비교하여 판단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차곡차곡 쌓여 높아진 페이브먼트
한 겹 한 겹 벗겨나가면 흙먼지 길 옆에
담배 팔고 옥수수 쪄서 팔던 오래된 정거장이 보인다
-「우리 외할머니니네 집」 부분
겹칠된 포장도로는 나무의 나이테를 닮았다. 이 적층은 제각각 한 시절을 보관하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그 한 겹 한 겹을 벗겨내면 포장되지 않은 길, 자신의 유년이 연루된 공간이 있다고 믿는다. 이 기억은 사물의 몫이면서 또한 나의 몫이다. 위 시의 이어지는 연에서 시인은, 외가에서 놀던 어린 날들을 선연히 기억해낸다.
시인은 삭아가고 낡아가는 세상을, 이 시집의 제목처럼 "적당히 쓸쓸하게"노래한다. 시간, 바람 속에서 풍화하는 세상에서 진행되는 시인의 산책이 암울하고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의 시선이 쓸쓸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적당'하기 때문이며, 풍화하는 삶의 아름다운 단면도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
민속촌 수양버들의 그늘을 걷다가 내 아버지의 아들과 내 아들이 당도한 대장간의 단단한 모루, 꽃나무를 후려치는 바람은 여전히 제 손목의 시계를 가리키며 교활하게 웃지만 우리는 그냥 불린 쇠에서 닳는 연장이 되어갈 뿐, 발로 밟고 손으로 돌리며 스스로 바람을 만들어 내는 저 대장장이의 근육들 얼마나 성스러운가 그러니까 달구고 식히며 큰 망치가 작은 망치를 만드는 정오에 맞으며 단련되는 망치와 때리며 낡아가는 망치, 세상엔 그것밖에 없는 것이다
-「망치가 망치를 만드는 정오」 부분
삼대가 대장간 앞에 멈추어섰다. 이 시각에도 예의 바람은 "여전히 제 손목의 시계를 가리키며 교활하게 웃"고 있다. 할아버지, 시인, 아들은 풍화하고 있는, 유한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한낱 연장에 지나지 않는 것도 같다. 삼대는 '낡아가는, 큰 망치'가 '단련되는 작은 망치'를 만드는 풍경을 함께 구경한다. 풍화 속을 견디는, 풍화와 싸우는 삶의 방식은 바로 이것이다. '나를 닮은 누구'를 만듦으로써, 비록 '나'는 풍화 앞에 패배하지만, '우리'는 살아남는다. 이는 풍화 속을 사는 위안이면서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풍화와 벌인 싸움의 승자이며, 사랑하고 교미하는 모든 것들은 미래의 승리를 준비하는 이들이다.
심재휘의 새 시집은 첫 시집답지 않은 집중과 밀도를 보여준다. 한 철 우리 시에서 애용되었던 '바람'은 그의 시에서 각별하고 색다른 함의를 지닌다. 그의 바람은, 시대의 바람이 아닌, 유한한 존재의 운명과 상관하는 바람이다. 그래서 그가 관찰하는 풍경은 단순한 묘사와 회억를 넘어 유한한 삶에 대한 실존적 통찰을 포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