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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 | [한상봉의 시골살이]
그들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한상봉의 시골살이(2005-01-07 14:13:09)
사방이 고요한 밤이다. 나는 오랜만에 어머니 집에 왔고, 오는 동안 내내 마음이 담담하다. 마음이 정성스러우면 다가오는 사건과 사람들, 환경이 모두 담백하게 다가오고 나는 그저 길을 가다가 의미있는 표지(標識, sign)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일까? 어제는 문의에 있는 청원군 청소년 수련관에 갔었는데, 안면이 있는 신부님이 관장으로 계시면서 몇 년 전부터 안중근학교란 걸 시작했고, 이번 겨울 통일캠프에서 일할 봉사자들을 위해서 이야기를 좀 나눠달라는 것이었다. 오후와 저녁, 두 차례 강의를 하고 다음날 일찍 무주 집으로 향했다. 문의에서 전북 무주로 가려면, 회남을 거쳐 판암 톨게이트로 들어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인데, 그 길은 큰 산을 휘돌아 넘어가는 가파른 길이었지만, 어제 수련관에 오면서 보니 대청호 구경도 할 수 있고 산세(山勢)도 괜찮았다. 그런데 회남으로 넘어가는 산길을 오르다가 그만 살짝 얼어있는 도로에서 화물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길옆 배수로에 처박히고 말았다. 렉카를 불러 꺼냈는데 다행히 몸 상한 데도 없고 자동차도 그런대로 멀쩡했다. 생각해 보니, 평소 비포장도로를 많이 달리다 보니, 작년 겨울에 갈아끼운 뒷바퀴가 형편없이 닳아서 제동력을 갖지 못한 모양이다. 한꺼번에 목돈이 들어가는 일이라 하루이틀 미루고 있었는데 그만 사고를 낸 격이다. 수입이 변변찮은 시골생활이 가져온 결과였는데, 오늘 아침에 신부님이 수고했다고 주신 돈이 채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구멍이 난 것이다. 몸이 다치지 않아서 그런지 속이 볶이지 않았다. 그 화물차를 몰고 청원 톨게이트 쪽으로 방향을 바꿔서 집에 돌아왔는데, 화물차에서 부르륵 소리가 자꾸 나고, 내가 다니던 정비소는 일요일이라 문을 닫았다. 오늘 오후엔 인천 어머니 집에서 위암 판정을 받은 둘째형과 만나서 함께 병원에 가기로 약속했는데, 아무래도 고속버스를 타야할 모양이다. 마침 인천에서 전화가 왔기에 웬만하면 전에 간호사로 일했던 큰 형수랑 함께 다녀오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웬만하면 인천에 와주면 좋겠단다. 그래서 말 그대로 웬만하면 가야지, 생각하고 안성면 터미널에 나갔더니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한 시간 가량 터미널에서 디펙 초프라가 쓴 <마법사의 길>이란 책을 읽으며 버스를 기다렸다. 이 책에선 “그대가 참나무나 사슴이나 하늘을 일분 이상 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소?”하고 묻는다. 우리가 마주 대하는 사물이 항상 보던 것이라 해서 낡은 것, 지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늘 새로운 것을 찾지만, 실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이름 붙이거나 고정된 틀로 보지 않고 자기 시선을 바꾸면 항상 모든 게 새롭게 다가올 것이라는 말씀이다. 버스가 신탄진휴게소에서 잠깐 쉬어가기로 하였던 모양인데, 버스 발판에서 바닥으로 내리딛다가 그만 발이 삐었다. 오늘 일진이 좀 나쁜 모양이다, 생각했다. 결국 몸이 상했지만, 그래서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인천까지 서서 가야하는 전철에서 고생을 하였지만, 누구 탓할 사람도 없었다. 속을 끓인다고 나아질 것도 없었다. 그러니, 잠잠할 수밖에. 담담하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도리가 없지만, 그저 지금 생각엔, 좀 그만 돌아다니고 쉬라는 전갈 같다. 하늘과 몸이 조응하여 강제로 나를 쉬게하려고 베푼 배려거니,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이순간 한밤에 밀린 글을 쓰면서, 정말 오래간만에 팔순 어머니의 자근자근한 음성을 경청하고 있다. 어머니 행복하세요, 속으로 말하고 있다. /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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