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 | [사람과사람]
닻 올린 전북 방송작가협회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5-01-07 14:05:18)
12월 4일 전주 시내 모 중국음식점. 화려하게 조명받아 오진 못했지만 나름의 영역과 자존을 지켜온, 그래서 들꽃 같은 생명력과 향기를 지닌 일군의 집단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전북 방송작가협회. 지역 방송을 이끄는 동량들이 협의체를 만들어 냈다. 방송 매체는 전파가 갖는 막강한 파급력과 언론의 고유한 사회적 권위가 결합되면서 갈수록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고, 방송 관련 직종은 젊은 세대들에겐 특히나 선망의 대상이다. 구성작가 역시 그 대열에서 빠지지 않는다.
그리 아쉬울 것도, 별스레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할 것 같지도 않은 이들이 음식점 회합을 '모의'하게 된 건 왜일까. 프로그램 제작에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파트너이면서도 오랫동안 제도적 소외에 가려져 왔던 이들. 협회의 닻을 올리면서 '프리랜서'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감내해야만 했던, 서럽다면 서럽고 고달프다면 고달픈 방송국 생활을 좀 더 열린 창구에서, 좀 더 단단한 울타리 속에서 실컷 토로하고 싶었다고 이들은 이야기한다. 협회 조직의 가장 큰 동인은 고급인력임에도 불구하고 프리랜서라는 이름으로 부담 없이 고용되어 온 작가라는 위치가 사용자 측만 살찌우는 부당한 상황에 노출되어 온 데 대한 저항감이다.
'동병상련'의 아픔은 얼마나 든든한 아군을 조직해 내는지…. 협회가 뜬 음식점 안은 그래서 눈물겹고도 따뜻한 자리다. 사회를 보던 누군가는 꾹꾹 눌러왔던 눈물을 울컥 쏟기도 하면서.
12년의 짧지 않은 경력을 쌓아오면서 어느새 지역 작가의 맏언니로 자리잡은 조희숙씨(전주 KBS)가 자연스레 회장직을 맡게 됐는데, 그에게선 후배들의 서러움이나 비장함과는 사뭇 다른 언어가 묻어 나온다. 첩첩의 칠부능선을 넘어 온 여유와 자신감이 설핏거린다.
"방송국 안에서 파트너쉽이 형성되지 않으면, 프로그램도 그렇고 우리 위치도 그렇고 풍전등화일 수밖에 없어요. 그 자리, 참 눈물겹더라구요. 스스로 자신들의 자리와 위치를 확인하고 건강이나 처우도 체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의미였어요. 매일 술자리 푸념으로 그쳤던 방송국 생활의 불합리나 불만들을 함께 만나 실컷 토로하고 공론화하자는 거죠."
그들은 가장 근거리에서 부딪히게 되는 방송국 프로듀서들이나 엔지니어들과 건강하면서도 대등한 파트너쉽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제도적인 보호 장치가 없는 이들에겐 당당한 관계 설정이 무엇보다 중요한 보호막이기 때문이다.
작가 협회를 조직하자는 제안이 조 회장을 통해 공론화 된 뒤에는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됐다. 조직화에 대한 회원들의 필요와 요구가 이미 반쯤은 일을 성사시켜 놓은 셈이다.
"12년째 작가 생활을 하면서 얼마 전 그런 자각이 들더라구요. 후배들이 없으면 내 자리나 내가 해 온 일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그래서 각 방송사 대표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구체적인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됐는데, 제안한 지 1주일만에 준비가 끝났어요. 설득이나 공감 형성이 굳이 필요없었던 거예요. 그만큼 회원들 각자가 조직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갖고 있었던 거죠. 현직 작가뿐만 아니라 전직 또는 휴직 상태에 있는 잠재 회원까지를 모두 대상으로 했어요. 그렇게 파악된 회원이 모두 마흔 아홉 명이었는데, 창립 총회에 마흔 일곱 명이 모였어요. 회원들의 순수한 열정이 고맙고 감동적이었죠."
우선은 "서러운 며느리들끼리 며느리들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자는 의도에서 협회를 발족시켰지만, 체계적인 조직 구성을 통해 작가 역량 강화를 비롯해 각 방송사 별 구성작가 네트워크 형성, 방송 소재에 대한 정보 공유, 그리고 수입이나 업무량, 업무 시간 등에 대한 데이터 제시 등을 주요 사업으로 진행해 나갈 계획이다. 대회협력분과와 교육분과, 사업분과를 꾸리게 된 것도 효율적인 사업 추진을 위해서다.
"우선 우리들 스스로를 좀 알자는 거예요. 누가 얼마나 일하고 얼마를 버는지, 그리고 유령처럼 떠도는 '방송국 괴담'의 실체를 공개해 현명한 대처 방안을 찾자는 거죠. 어떤 방송국에서 어떤 작가가 어떤 억울한 일을 당했다더라, 하는 비상식적인 얘기들이 유령처럼 떠돌거든요.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명쾌하게 정리하자는 거고, 협회가 그 창구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조 회장은 그러나 프로듀서와 대치하거나 대립적인 구도를 만들어 내자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구성작가라면 프리랜서라는 자유로운 위치를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지혜를 스스로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협회가 힘을 얻기 위해선 작가들 자신이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고 지혜를 키워갈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작가는 PD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해요. PD는 작가의 요구와 의견을 관철시키는 창구이기 때문이죠. 저희끼리 우스갯소리 반 자괴가 반, 프리랜서는 죽도록 일하고 힘은 하나도 없는 존재라고 이야길 하는데, 달리 생각하면 작가는 결정적인 순간에 쉴 수도 있고 이 프로그램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해요. 작가는 사람들 속에서 글을 쓰는 존재예요. 굉장히 매력적인 직업이죠. 이 직업을 사랑하는 만큼 상상력이나 감성을 해치는 장애요소를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길을 찾으려는 노력이 일차적으로 필요하다는 거죠."
구성작가는 방송을 통해, 사람을 통해 세상을 보는 스펙트럼을 넓히고 인간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쌓아갈 수 있는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말하는 조 회장. 그는 고용불안이나 PD와의 대립만을 의식하게 된다면, 작가가 가질 수 있는 자유로운 상상력을 스스로 가둬놓을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프리랜서라는 위치를 당당히 누리고 즐길 줄 아는 지혜를 찾아가야 한다는 이야기. 회원들 역시 작가로서의 역량과 자질이 공동의 주장과 목소리를 내는 기본 자격이라고 믿기 때문에 초기 사업도 이 부분에 역점을 둘 계획이다.
"각자 소속된 방송국이 다르기 때문에 우선은 서로의 방송을 모니터 하는 일을 시작하려고 해요. 아직까지 이런 채널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협회가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 바라고, 또 하나는 네트워크를 형성해 지역 정보를 효과적으로 분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작가 협회와 연계한 세미나 개최 등을 계획하고 있구요."
작가 일군은 창립 모임에서 보여준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힘이 구석구석 스며들어가 작가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궁극적으로 좋은 방송 환경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길 바란다. 패배주의적인 피해의식에 사로잡히기보다는 작가로서의 고유한 자기 위치를 찾아내 빛나는 방송인으로 바로 서겠다는 이들의 각오가 건강하고 다부지다.
선배와 후배가 협회라는 따뜻한 울타리 속에서 서로의 거울이 되고 희망이 되는 날, 작가라는 화려한 이름 뒤에 숨은 서럽고 억울한 눈물이, 사람들 속에서 글을 쓰는 이들에게 빛나는 자산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작가 협회를 주목하는 이유. '죽어라 일하고, 힘은 전혀 없는' 프리랜서의 길이 더 이상 참고 견뎌야 할 험준한 산맥이 아닌,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맑은 샘물이 되어 사람 사는 세상에 더 높고 밝은 희망을 던져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