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아들 양육기,아이 엠 파더
신귀백의 영화엿보기(2005-01-07 13:58:11)
이정록 시인은 주름살은 내부로 가는 길이라 했던가. 나이보다 주름이 깊은 숀펜. <데드맨 워킹>에서 살인강간죄를 저지르고도 뉘우칠 줄 모르는 사형수 역으로 깊은 인상을 심어준 그. 얇은 윗입술, 인중이 빠진 코, 일부러 연기를 안해도 사악함이 묻어나는 느끼한 눈빛. 이 '배우'가 따뜻한 바보로 나온 이야기에 무장해제되어 처음부터 감정을 놓고 눈물이 마를만 하면 울고 또 울었다.
구조는 매우 감상적이다. 수영장이 딸린 저택과 바람둥이 남편은 있어도 사랑은 없는 잘나가는 여자 변호사(미셀 파이퍼)와 지능은 낮아도 사랑만은 충만한 바보의 이야기. 훌륭한 부모에 대한 척도는 지능지수가 아니라 따끈한 사랑이라는 메시지다. 그 나라는 부모의 지능이 낮을 경우 양육이 가능한가까지도 걱정하는 나라여서 샘은 뺏긴 아이를 찾기 위해 여변호사에게 의지한다.
말이 필요없는 말. 엄마는 필요하다. 학교 들어가기 전에 엄마에게, 도깨비 씨름하는 이야기로, '쇠 金'자 쓰는 획순을 배웠다. 곧은 낚시를 하던 강태공, 바리공주, 또 엄마 젖을 물고 죽은 도둑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후일 생각해 보니 구비문학이라 이름할 만한 것들이었다. 엄마가 돈을 벌기 위해서 바느질을 할 때는 곁에서 재봉틀 사용하는 법도 배웠다. 그러나 우리집 방 빗자루는 엄마가 아들들 종아리를 때리는 바람에 제명에 다 닳아진 적이 없다. 루시에게는 두들겨 패는 엄마가 없다. 책도 더듬거리는 바보 아빠가 있을 뿐. 영화에서의 바보는 똑똑한 사람을 바보로 읽게 만드는 장치다. 미셀 파이퍼처럼 우리도 하루종일을 속으로 말하는 법과 외교적으로 말하는 법, 참는 법, 피하는 법들로 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은가. 그런 하루를 보내는 나도 샘처럼 아빠가 되었다. 벌건 핏덩이 때문에 비린내 나게 방이 더웠던 기억.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웠다. 우유를 먹이고 트림을 할 때까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오줌이 든 고추는 춘란꽃대 같았고 당연히 그 포물선도 이뻤다. 물론 황금똥도. 아이를 본다는 것이 그냥 울지 않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의미있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는 나는 손을 들어버렸다. 벽초가 쓴 『임꺽정』의 곽오주 신세가 이해 되었다.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신다는 노랫말도 그냥 수사만은 아니었다.
친구 아들놈이 한글을 먼저 읽는데 속이 편할 수가 없었다. 다섯살 때, 심장에 손을 대더니, "아빠 이 속에서 누군가 자전거를 타고 있어" 이런 시를 쓸 줄 아는 놈에게 체르니와 바이올린을 시켰다. 헛된 욕심들로 부모가 너무도 많아 아들은 쉴 곳이 없었을 것이다. 매일 아침, 영어 가르치는 전화 프로그램으로 아이에게 고문을 했다. 젓가락 잡는 법, 김치 먹는 법으로 무던히 싸우면서 아이는 학교에 들어갔다. 걸스카우트 옷을 입은 예쁜 루시처럼 아들도 보이스카우트복을 턱 입으니 가난하게 큰 애비의 한 하나는 풀린 듯했다.
"나는 행복해. 다른 아빠는 함께 놀아주지 않잖아." 깜찍이 요정 루시는 말한다. "다른 아빠들과 달라서 미안하다"는 바보 샘의 말에 나는 악어 같이 눈물을 흘린다. 그래, 이 영화에는 악역이 없다. 그러나 나는 악역이다. "못해준 게 뭐야, 학원을 안 보내줬냐, 뭐 먹을 걸 안줬냐?" 아들은 토익을 가르치는 학원을 다닌다. 이제 죽어도 내복은 입지 않겠다고 뻗대는 중학생이 된 놈은 문화유산답사를 또 월드컵을 데리고 다녀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기억력 중에서 청음능력이 가장 고급스럽다던데 나는 왜 장면과 음악이 하나로 안 떠오르나? 그러나 나의 고슴도치는 샘을 보면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집에서 듣는 OST 중 Blackbird를 들으면서, 아빠를 그리워하는 루시가 새처럼 날아온 종이 비행기를 올려다 볼 때라고, 그 장면을 정확히 기억해 낸다. 놈의 할머니 표현을 빌려 말하면 개보다 낫다. 그놈이 드디어 묵은 엘피를 꺼내 듣는다. 장르에 대한 취향을 가지는 것을 보면서 한 인간으로의 영혼의 모습을 느낀다. 다 큰 것이다. 글을 마치는데 들리는 9회말 투아웃에서 역전한 주름깊은 盧의 승전보! 아름다운 바보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선생님 독자들! 노루 꼬리 같은 2월, 혹시 자습시키려면 <아이엠 샘> 비디오로 꼭 보여주세요.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