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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 | [정철성의 책꽂이]
누가 김기림을 모르시나요?
정철성의 책꽃이(2005-01-07 13:53:20)
책방을 둘러보다가 『김기림평전』이란 제목이 눈에 들어오기에 차례도 보지 않고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손을 비비고 앉아 펼쳐보니 과대광고가 따로 없다. 평전이란 비평과 전기의 합성어이다. 작가의 평전은 그의 작품과 삶의 관계를 비평적인 안목을 소개하는 책이 아닌가? 내가 산 책은 평전이라기보다 자료집에 가까운 것이었다. 덕분에 수필 하나를 더 읽었다. 1948년 9월 7일자의 국제신문에 실렸다는 "아메리카니즘 여담"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지 중장이 떠났다. 여하간에 그 장문의 성명서들을 더 읽지 않게 되었다." 요즘 북핵문제가 궁금하여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를 들여다보다가 쓴 입맛을 다셨더니 반세기 전과 별로 다를 게 없음이 더 끔찍하다. 무슨 인연인지 내 책꽂이에도 김기림의 저서가 있다. 1946년 초판 『문학개론』으로 문우인서관에서 발행한 책이다. 이 『문학개론』은 해방 후 김기림이 서울에서 여러 대학에 출강하면서 필요에 따라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김기림평전』의 저자 김학동은 김기림의 『문학개론』이 『문장론신강』과 함께 "교과서적인 단행본으로서 김기림의 비평활동 방향과는 크게 관련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한다. 김기림의 활약은 주로 1930년대 모더니즘과의 연계 속에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이를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과 자료가 없는 처지이니 나는 시시비비를 따질 수 없다. 여하튼 손안에 있는 책을 먼저 들여다본다. 시와 시론이 일치하는 시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시론이 없어도 좋은 시를 쓰기도 하고, 시보다 시론이 더 주목 받는 경우도 있다. 시인의 시는 나름대로의 질서 속에서 변화를 따라 간다. 내용과 형식의 변용은 시론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나는 김기림의 문학적 사고 가운데에도 해방이라는 감격적인 국면을 맞으면서 새로운 눈뜸이 있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 결과를 확인하기 어려운 것은 그의 문학적 여정이 타의에 의해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문학개론』의 머리말은 지식과 이해에 대한 구분으로부터 시작한다. 김기림은 "이해라고 하는 것은 현상을 상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표현을 상대로 하는 것이어서 문학이나 예술작품이 한 표현으로서 지니고 있는 의미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파악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작품을 감상이 아니라 이해의 차원에서 다루는 것은 주지주의적 접근이 그의 기본 태도임을 알게 한다. 김기림의 이해는, 반복하자면, 표현 속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일이다. (이것은 고정된 의미의 존재와 객관적인 의미 파악의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텍스트를 열린 공간으로 취급하려는 최근의 이론과는 어긋난다.) 김기림이 비판하는 것은 이해를 방해하거나 오도하는 "주관적 인상이나 감상 또는 일화의 무방법한 개괄나열이거나 형이상학적 공상이 낳은 가공의 개념의 제시"이다. 이러한 유형들의 결함은 "하나는 사실성의 빈혈(貧血)이오 다른 하나는 그 결과에서 오는 초시간공간성(超時間空間性)의 묵인이다. 다시 말하면 문학의 문제를 그 역사성과 사회성을 표백시켜 허공중천(虛空中天)에 유리(遊離)시켜 놓는 것이다." 역사성과 사회성, 다시 말해 "그가 속한 시대의 문학"을 거론하는데서 해방공간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문학의 과학을 소개하면서도 김기림은 문학의 이해에 대한 강조를 늦추지 않는다. 그는 이론의 습득보다 작품의 이해가 우선임을 분명한 어조로 선언한다. 그런 다음 이해를 위하여 병행과 보조의 재료로 심리학과 사회학의 두 기둥을 세운다. 『문학개론』은 본문 87쪽, 부록 11쪽의 얇은 책자이다. 이 정도의 두께에는 세세한 논박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심리학 부분을 보더라도 서너 쪽 사이에서 설명이 끝나고 오웬, 엘리엇, 콕도, 쌘드벅, 쉘리, 키츠, 베를레느, 에이치 디, 쉑스피어 등의 인용이 나머지를 채우고 있다. 김기림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적,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자극을 받고 반응을 한다. 이것이 경험이며 경험의 축적으로부터 관념이 발전한다. "시인이나 작가가 작품 속에 담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러한 경험 내지 관념의 한 조직인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작품은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향하여 "유기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러한 통일은 경험과 상념이 먼저 조직되고 여기에 언어의 형상화가 뒤따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로써 생각한다." 문학작품은 언어의 조직이며 동시에 경험 내지 상념의 조직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해석은 당대의 독자들에게 틀림없이 신선하게 들렸을 것이다. 이어서 김기림은 "경이의 느낌"을 끌어들인다. 문학작품 안에서 독자는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고 경이의 감정을 일으킨다. 또는 막연하게 생각하였던 것을 시인이나 작가가 구상화하여 보여 줄 때 감명을 받는다. 이것을 김기림은 막연한 상태에서 명료한 상태로, 혼돈에서 질서로 정돈되어가는 길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경이의 경험과 재인식의 경험"이다. 그러나 경이를 체험한 독자가 "순화되고 통일되고 조직된 전일(全一)한 의미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함은 논리의 비약이다. 작품의 의미가 독자의 심리에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는 의식적, 무의식적 영향이 경이의 느낌에만 의존한다면 문학의 기능을 오히려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문학의 사회학에서 김기림은 작품과 작가와 문학의 조류가 일정한 시대와 사회에 속한 것임을 천명한다. 작품은 "역사적, 사회적 전(全)관련의 그물"에 걸려 있다. 김기림은 여기서 전자기학의 필드, 즉 장(場)의 개념을 원용하여 두 개의 장소를 구분한다. 하나는 문학사의 흐름 가운데 작품 또는 작가가 차지하는 위치이다. 두 번째는 "사회경제사의 일정한 단계에 기초를 둔" 장소이다. 정치경제적 조건의 변화를 기초로 하는 작품의 이해 방식을 좌파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김기림에게서 이러한 증후가 나타나는 것은 역시 시대의 분위기일 것이다. 물론 김기림은 다음과 같이 도식적인 대비를 부정한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문학과 사회의 관계는 반드시 일률적으로 사회적 조건이 완숙해진 다음에 그것에 해당하는 문학이 나온다던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함이다." 여기까지가 엄밀한 의미에서 이론적인 부분이다. 문학의 장르, 비평문학, 세계문학의 분포, 문학과 예술, 현대문학의 제(諸)문제, 우선 무엇을 읽을 것인가 등으로 구분된 나머지 부분들은 예증인 경우가 많다. 장르를 설명하면서 시인이었던 김기림이 소설, 시, 희곡의 순서로 배치하고 소설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한 것은 단지 인용문의 길이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근대문학에서 소설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는 것 같다. 따로 떼어 제목을 붙였지만 비평문학에 대한 기술은 데면데면하다. 김기림은 문학의 주(主)가 작품자체임을 다시 강조한다. "문학의 전 영역에 있어서 비평의 활동이 전에 없이 자못 활발한 것도 한 추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던지 작품실천과의 상호관계에서만 건전한 발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적이고,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충고이다. 현대문학의 제(諸)문제를 다룬 9장은 본문을 천천히 읽고 다른 자료들과 대조해 보아야 한다. 해방공간의 김기림이 가졌던 문제의식이 올바른 것이었는가, 또 그의 계급적 지향은 어느 쪽을 가리키고 있었는가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론 한 권의 내용만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것이다. 김기림의 고향은 함경북도 성진에서 가까운 학성군 학중면 임명동이다. 그의 시에 "나의 고향은/ 저 산넘어 또 저 구름밖/ 아라사의 소문이 자조 들리는 곳"이라는 구절이 있다. 새해가 되었으니 그의 고향에 가 볼 꿈을 꾸어도 될까? 아니면, 더 기다려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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