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 | [안영이노의 문화비평]
우리 산들은 '러브조이 아일랜드'가 아닐까
안이영노의 문화비평(2005-01-07 13:51:48)
호랑이 발자국
문화공간은 자연공간과 분리되지 않는다. 인공환경을 만들어 가는 문명이란, 환경을 어떻게 바라보고 자연을 어떻게 다루는가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가꾸고 놓아두는가 하는 데에, 바로 문화의 질이 달려있다. 결국 산업화 속에서 사라져가는 자연공간은 우리의 현대문화의 수준을 보여준다. 사라져간 동물과 곤충에 대한 도시인의 꿈은 바로 우리의 의식정도를 반영한다.
1990년대 들어 잊을 만 하면 접하게 되는 신문기사 중 하나가, 바로 이 땅에 멸종된 호랑이가 돌아왔다는 추측이다. 우리가 호랑이 발자국에 연연하고 또 열광한 것은 한국인의 콤플렉스를 보여주는 동시, 산업화 이후 우리 문화에 대한 위기의식과 환경위기에 대한 담론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호랑이는 한국인 의식구조의 원형이다. 한국인의 전형인 호랑이는 신화의 회복에 대한 꿈이다. 발자취를 감춘 호랑이는 '복원'을 의미한다. 호랑이는 민족의 웅혼을 환기하는 광개토대왕의 꿈이다. 하지만, 우리가 경계해야할 편협하고 강력한 민족주의의 징후와도 연관됨을 놓쳐서도 안 된다.
또, 호랑이는 자연 뿐 아니라 사라져간 달동네에 대한 반성이다. 치달려온 산업화의 길에 대해 회의하고 성찰하는 한국인의 사회심리를 볼 수 있다. 결국 10년간의 호들갑스럽지는 않지만 결코 끊이지도 않는 '조용한 국민캠페인', 호랑이 발자국 찾기는 회복에 대한 열망이 낳은 것이라 하겠다.
1990년대 초반 들어 산업화의 성취를 맛보자, 경제보다는 문화적 풍요를 택하고 생태가치를 되돌아보자는 담론이 일게 된다. 이 때 호랑이는 사라진 전통문화와 인정, 살기 좋은 땅을 뜻할 지 모른다.
그런데 1990년대 후반의 경제적 위기를 지나고, 2000년대가 되었는데도 호랑이 발자국에 대한 기사는 신문을 장식한다. 호랑이가 되돌아오는 꿈이 우리의 마음 속에 몇 년만에 부활했다. 그때의 사라진 호랑이는 무엇일까. 부실경제구조와 기업의 문제점을 통해 국민이 처절하게 체험한 것으로서, 고속산업화에 대한 회의 어린 성찰을 뜻한다. 하지만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호랑이는 동시에 강력한 경제적 재건, 그리고 민족적 자부심을 가리키기도 한다. 꺾인 민족기상에 대한 갈망 말이다.
사라진 동물의 의미
우리는 태백산에 반달곰이 살고 있음을 확인했고, 멸종되었던 것으로 알았던 늑대와, 심지어 최근에는 상대적으로 생존적응이 힘든 표범도 다시 한반도에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했다. 산업발전만큼이나 환경복원에 대한 바람이 커진 것을 반영하듯 말이다. 이제 호랑이 차례다.
동물들의 재등장은 없었던 종이 그냥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숨었다가 인간들이 충분히 반성했기 때문에 용서하고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산허리가 서로 연결되고 한국의 산들이 살만한 곳이 되어, 생태적인 보장이 이루어짐으로써 시베리아의 호랑이들이 우리 땅으로 유입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설악산과 오대산에 백두산 호랑이는 없다. 도시벨트와 관광벨트가 산허리를 끊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가 백두대간에 쇠못을 박아 기를 끊는 것처럼, 산맥은 있되 초록색 맥이 끊긴 산은 겉으로만 산이요, 온전한 생태계라 할 수 없다.
내 고향이 서울이니, 난 서울 땅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떤 이는 서울의 남산을 잘 가꾼 자연이라고 감사한다. 그나마 살풍경한 국제도시 서울에서는 감사할 일이다. 어떤 이는 또, 침엽수가 가득한 곳에 다람쥐와 비둘기만 살고 도시에서 올라온 고양이가 먹이피라미드의 최고 정점에 있는 서울의 남산도 하나의 독자적인 생태계가 굴러간다고 말한다. 자연의 치유력은 위대하고 또 그 적응하는 힘은 질기기 그지 없으니, 살쾡이나 스라소니가 오지 않는다 해도 자연과 살림을 꾸리면서 스스로 잘 돌아가지 않느냐는 뜻이다.
과연 그런가. 우리는 폐수로 오염된 한강이 그나마 서울 땅에 남아있어 주어 감사한다고 말한다. 한강의 짙은 물색이 점차 회복 되어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까지, 어느 순도에 이르기까지 오염을 푸는 것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문명도시에게는 어느 정도든 자연의 착취와 그로 인한 오염이 불가피한 생존방식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옅어지고 맑아지는 강물이 곧 회복은 아니라는 점이다. 맑아지는 강물 이전에 못지 않은 생태관계가 형성되었는가를 따져볼 때 회복은 의미를 갖는다.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환경의 복원은 여전히 이기적인 것이다. 그 물 속에 사는, 혹은 살아온 생명체의 입장에서 생태환경이 조성되었는가의 기준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
모셔진 자연은 동물원과 같다
이것은 완전복원이나 불완전한 복원이냐의 개념적 문제가 아니다. 자연 살리기가 적극적인 조성에서 이루어지냐 훼손방지의 차원으로 이루어지냐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인간중심적인 자연보존과 생명중심적인 자연보존의 차이라고 하겠다. 우리 눈에 비치는 회복의 모습과 그곳을 노닐 노루와 전나무의 입장에서 보는 회복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제대로 보는 길은 생태계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대부분의 도시 뒷산에는 바로 그것이 없다. 초록풀과 나무들을 보며 우리는 도시 안에서 감사할 따름이지만, 초록풀과 나무를 이용하는 다람쥐, 다람쥐를 필요로 하는 여우, 그리고 그 여우와 공생하는 덤풀과 냇가가 잘 굴러가는지는 보지 않는다. 그것은 또 하나의 볼거리, 즉 스펙타클이 되었고 그것은 주민을 위한 박제품이고 주민들을 위안하는 관광상품 아닌가.
초록 풀만 있고 스라소니와 여우가 다시 오지 않는 서울의 남산은, 초록풀이 있고 살쾡이와 멧돼지와 노루가 간신히 살지만, 호랑이와 곰과 이리는 여전히 존재하지 않는 지리산과 다를바 없다. 한편으로 서울의 남산에 없는 살쾡이와 사슴이 태백산에 있다한들, 있을 법한 동물의 피라미드가 온전치 않고 잃어버린 사슬고리가 생기고 오염된 등산색의 쓰레기더미 속에서 있던 종의 풀들마저 사라져간다면 더 나은 것도 없다.
먹이 피라미스의 상층을 차지하는 육식동물, 상대적으로 적응이 어려워 쉽게 멸종되는 종들의 복원은 상징적인 것이다. 멸종위기의 동물을 보호하는 뜻은 생태계의 완전한 복원에 대한 열망이다. 단지 몇몇 상징적 동물이 돌아왔다 해도, 여전히 오염된 개울과 계곡에 가재가 살지 않고 탁한 공기 속에 아침 이슬을 머금는 거미의 개체수가 줄어들지도 모른다. 사라진 동물, 까다로운 적응조건을 가진 멸종위기 동물의 의미는, 자연과 생명체, 그들의 입장에서 최적으로 살기 좋은 상태에 도달했는가의 지표라는 점이다.
겉으로 볼 때 푸른 남산,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하는 국도변 산들, 너구리와 산돼지, 반달곰의 소수 개체가 발견된 지리산은 모셔진 자연이다. 남산을 볼 때마나 모셔진 도시의 산은 식물원과 다를 바 없다. 박제물이 진열된 자연박물관의 메타포라고 느낀다. 청계천복원의 열기로 보존하려는 남산 자연의 한 언저리에 위치한 남산동물원은 아이러니다.
러브조이 아일랜드(lovejoy island)라고 아는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처럼 보기에는 그럴듯한 자연이나 메뚜기 하나 뛰놀지 못하는 땅이다. 우리의 산들은 러브조이 아일랜드가 아닐까. 하나의 생태계는 그곳만을 잘 가꾼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산허리가 다 이어지는 식으로 전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지 않으면, 결국 잘 가꾸어 반달곰과 표범과 호랑이가 살기를 바라지만 결국 '슬픈 섬'이 되고 만다.
높은 문명은 결국 물질이 아닌 마음의 안녕을 바라게 되고, 그래서 문명은 자연을 복원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는다. 시베리아 호랑이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꿈이 보고 진열하기 위한 꿈이 아니라, 인위적인 유전자조작으로 백두산 호랑이를 복제하려는 손쉬운 문명의 꿈이 아니라, 그들에게 그들의 것을 돌려줌으로써 우리도 안식을 취하려는 희망이길. / 문화기획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