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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 | [문화시평]
전북 연극 아킬레스 극복한 모처럼의 단비
최기우 전북일보 기자(2005-01-07 13:44:43)
'팔자 좋은 뚜벅이'의 익산가는 길. 오랜만에 시외버스를 탔다.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에도 “팔자 좋네. 연극 보러 익산까지 가고…”라며 꼬집기만 하는 ‘팔자 사나운 오너’들의 냉기 탓이었다. 익산에서 터잡고 사는 知人들도 오후 6시는 촛불시위에 참가해야 한다며 동행을 거부했다. 소극장연극제의 마지막 작품, 극단 ‘작은소·동’의 <행복하세요> (연출 이도현 作 윤석정)는 빈 좌석이 많았다. 객석이 차고도 넘쳤던 다른 참가 작품들과 비교하면 난감한 일. 원수 놈의 미국 때문이었으리라. <행복하세요>는 당신의 행복을 기원하겠다는 바람이 아니라 사이비 교주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암흑 같은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비극적인 소품들로 전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않을 만큼 처절한 결말을 이끌어냈지만 극을 이해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사건의 빠른 전개는 경쾌했지만 군데군데 꼭 들어갔어야 할 내용조차 사라진 것이 원인이었다. 무대를 들고나는 배우의 부자연스러운 동선이나 채 5m도 되지 않은 거리에서 배우의 소리가 허공을 맴돌던 것도 한 이유. 원형의 소극장은 매력적이었지만 연극을 올리기에 그다지 적합한 공간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장면전환이 잦아 관객을 너무 오래 어둠 속에 방치한 책임도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내 5개 극단이 참여해 전주창작소극장과 익산솜리예술회관 소극장 무대에서 열린 제10회 전북소극장연극제.(2002.11.28∼12.22) 연극제는 시작부터 말이 많았다. 전국연극제를 치르며 소진한 기력과 행사 뒤 찾아온 허탈감, 지역 희곡작가의 부족으로 인한 작품 부재, 시립극단의 해외공연, 기성 배우들의 외도(?) 등 악재가 많았던 탓이다. 또한 소리문화의 전당 모악당·연지홀 등 큰 무대 공연이 잇따른 덕에 ‘소극장’이 주는 매력이 입에서만 맴돌 뿐 쉽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게 된 도내 연극인들의 新풍토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를 동반하는 법. 신인배우와 창작극 부족이라는 전북 연극의 아킬레스가 오히려 단비를 내렸다. 소극장연극제 첫 무대는 극단 ‘명태’(대표 최경성)의 <날 좀 안아주세요>(연출 최경성 作 닐사이먼). ‘명태’가 지난 5년여 동안 옴지락옴지락 하면서 극단의 정체성을 모색해왔다면 이번 무대는 그 과정에 대한 화답이 아닐까 싶다. 공연시간 120분. 몇몇의 다급한 관객이 무대 뒤, 배우들의 대기장소를 지나 화장실에 가야할 만큼 시간은 길었지만 공연이 끝나고 트집잡는 관객은 없었다. 배우들이 관객의 시선을 놓치지 않았던 탓이다. 줄곧 배꼽을 잡게 했다가 순간 코를 훌쩍이며 눈물을 쏟게 했고 결국 한없이 기쁘게 했다. 극에서 정신·신체적 장애가 있는 막내 소라(임지수 分)가 성숙한 여자가 되었음을 인정해야 하듯 이제 도내 연극인과 관객들은 극단‘명태’가 이 지역 연극판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리잡았음을 인정할 때가 됐다. 극단 ‘창작극회’는 김정숙씨(창작극회 단원)의 창작희곡 <옷 벗는 여자>(연출 임정용)를 무대에 올렸다. 승부수는 이영경씨(춘자 易)와 이경은씨(사라 易)의 약진이었다. 5년차 배우인 영경씨(24)와 전북연극협회 신인연기상(2000년)을 수상한 경은씨(31) 모두 꾸준히 연기활동을 해오면서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터라 이들의 열연은 더 돋보였다. 영경씨는 매번 잡혀오면서도 끝까지 도망갈 기회만을 노리는, 7년차 윤락여성 역할. 그가 이 역을 질펀하게 소화해 객석을 웃음의 향연장으로 만들었다면 경은씨는 몸과 마음을 처절하게 버림받아 수명이 다한 윤락여성의 쓸쓸한 심정을 객석으로 전이시켜 온통 눈물에 젖게 했다. 영화 <창> <나쁜 남자> 등을 통해 그들의 적나라한 일상을 엿본 체험이 없지 않았지만 연극 <옷 벗는 여자>가 보여준 일상은 더 직설적이었고 끔찍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다양한 폭력을 배우들은 온 몸에 멍자국이 선홍할만큼 구체적으로 보여줬다. 허나 특별한 직업군의 일상을 섣부른 짐작과 과민한 상상으로 보여준 탓에 배우들의 연기는 조금 과장되고 어설픈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휴대폰과 몰래카메라 등 현재의 소품을 등장시키면서도 대사와 캐릭터는 7·80년대 식이어서 윤락여성의 지금 모습을 그려내는데 적잖은 거리가 있었던 것도 마찬가지였다. 극단‘하늘’은 조각가인 경선(홍자연 分)이 자신과 동생을 성폭행 했던 친삼촌 황검사(권오현 分)의 죄를 묻는 과정을 그린 <오늘>(연출 조승철 作 이만희). 작품이 양귀자의 소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과 비슷한 캐릭터·사건 전개를 유지해 다소 맥이 빠질 수밖에 없었지만 잔인한 고문 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상당한 매력이었다. 특히 표독하고 잔인하면서도 애처로웠던 홍자연씨의 연기는 실제와 구별이 모호할 정도로 세심했다. 연출 조승철씨는 지난해 <돌아서서 떠나라>에 이어 극작가 이만희 교수(동덕여대)의 작품을 선택했고, 역시 단 두 명의 배우만으로 승부를 걸었다. 하지만 올해는 원작에 너무 충실한 탓에 젊은 연출가의 패기를 찾기 어려워 다소 실망스러운 면도 없지 않았다. 이번 연극제의 성과는 탄탄한 신인 배우와 창작 희곡의 탄생, 두터운 관객층 확보로 요약된다. 극단 ‘명태’의 강지애·성상희·이지순·최은선씨, ‘창작극회’의 이혜지·주서영씨, ‘작은소·동’의 오지윤·이상연씨 등 비중 있는 배역으로 관객들과 만난 새내기배우만 해도 10여명. 이번 연극제가 한껏 신선하게 다가온 이유다. 또한 ‘명태’의 임지수, ‘창작극회’의 이영경·이경은, ‘하늘’의 홍자연, ‘작은소·동’의 안혜영씨 등 2∼5년차 배우들의 한껏 성숙해진 연기도 눈에 띄었다. <날 좀 안아주세요>는 평균 1백명이 넘는 관객이 몰려 성황을 이뤘고, ‘창작극회’와 ‘하늘’의 공연에도 적지 않은 관객이 모여 한껏 폭 넓어진 연극 애호가 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 작품 중 창작 초연 3편(마임 포함), 각색 1편이 무대에 올라 창작극 부재라는 지역 연극의 아킬레스를 해소할 수 있었던 점도 긍정적인 면이다. 하지만 일부 극단의 완성도 낮은 작품은 실망을 안겼다. 세밀하게 다듬어지지 않은 희곡과 원작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연출도 관객의 감동을 자아내기에 한계를 드러냈다. 서툰 문장과 내용에 우연·억지가 많았던 것을 알고 있었다면 굳이 완성되지도 않은 희곡을 무대에 올릴 필요는 없었을 터. 관객의 안목이 높아졌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말이다. 또한 무대 경험이 적은 신인들이 무대 곳곳에서 보였던 크고 작은 실수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배우·스텝의 소통 부재가 초래한 다양한 사고나 배우들의 연습 부족 등이 보였던 점도 아쉽다. 좋은 연극은 배우·스탭, 배우·관객간에 자발적이고 순발적인 교감이 일어나야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고 볼 때 더 그렇다. 소극장연극제는 워크숍이 아니라 극단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정기공연이기 때문이다. 최기우 | 1973년 전주에서 태어났다. 전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북일보 뉴미디어부 기자로 있다. 최근 희곡 작품 '귀싸대기를 쳐라'를 내놓았으며, 음악극 '혼불'을 공동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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