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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 | [문화시평]
소소한 사물에 담긴 따뜻한 시선
조병철 화가(2005-01-07 13:41:53)
제 9회 전북청년미술상 수상기념 지용출(39)의 5회 개인전이 ‘풀이 눕는다'의 주제로 지난 21일(토) 얼 화랑에서 열렸다. 이 지역에서 판화작업을 일관되게 견지하는 지용출의 이번 전시는 '풀'이 갖는 조형적 성격상 겉으로는 특이하지 않은 담담함으로 읽혀진다. 이러한 느낌의 근저에는 그의 현재의 삶이 반영되어 있다. 지난해 겨울 그는 전주를 무대로 활동을 시작한지 8년 만에 그의 부지런하고 검소한 노력의 결과 30여 평의 결코 작지 않은 그만의 작업실을 당당히 일궈냈다. 손수 2겹의 블록을 쌓아 조립식 골조 판넬로 지붕을 덮은 소박한 그의 작업실은 그것이 작가에게는 일반 시민이 오랜 시간의 근면함으로 자신의 집을 마련하는 행복과 같은 것임을 나는 부러워했다. 그렇게 금구 작업실에 둥지를 튼 지난 1년여 시간의 흐름이 이번 그의 전시에 일기처럼 그려졌다. 교외의 한가로운 작업실에서 작가가 맞이하는 시간은 달콤하다. 그 달콤함은 생에 대한 감사와 자신이 지난 시간 보여왔던 작업에 대한 성찰. 새로운 모색 등으로 이어진다. 그동안 지용출이 보여왔던 작업에 대한 태도는 지난 80년대 민주화의 열망이 강렬했던 시절 민중미술이 지향했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의 판화는 단조롭고 강렬했으며 그 내용은 민중(?)이 바라보는 안타까운 삶의 시각을 자신의 작가적 태도와 동일시하려는 그래서 사회의 민주적 변혁과 평등의 구현을 소망하는 민중의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한 시각이 전주에 내려온 초기 몇 년간의 지용출의 작업에도 지속되었는데, 당시 그는 효자동의 한 아파트 지하 작업실에서 후배와 함께 공방을 열어 판화작업을 시작하였다. 97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인 나무갤러리에서 열렸다. 그때의 작업들은 무척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함들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었지만 그의 순수한 의지가 돋보이는 전시회로 기억되었다. 그러한 그가 아내의 직장과 함께 김제에 집을 얻고 미술학원을 열고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저녁에 작업하는 노력으로 98년 서신갤러리의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는데, 곰소 갯벌을 에칭으로 그린 동판화와 폐선의 닻 등을 소멸판법으로 찍은 목판화. 그리고 마늘 등 소소한 사물의 서정적인 판화 등에서 그의 시각적 변화가 감지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이후 김제 용지의 농가창고 작업실에서 본격적인 작가적 양식의 정립으로 귀결되어 가는데, 내가 볼 때 그의 이러한 변화는 자연으로부터 얻게된 인간치유의 심정적 정서와 자식의 출생과 성장, 경제적 안정이라는 가족사의 건강한 변화, 그리고 문민정부의 출현이라는 정치적 지형의 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99년 수입이 보장되는 학원을 접고 작가로서의 용기를 낸 이후 두 번의 개인전을 더 치르며 안정된 시각과 세련된 양식으로 별 무리 없이 전업작가로서 입지를 다져왔다. 그가 일궈낸 삶과 현실의 결과는 과욕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당연한 귀결이였다. 이번 전시에는 지용출의 지난 1년여의 작업실 일기에서 읽을 수 있는 변화의 모습들이 있다. 망초꽃 핀 봄 <풀이 눕는다> 방아깨비가 있는 <여름> <사마귀> <가을 하늘> <늦가을> 등에서 보인 '수인판화'라는 형식의 접목이 그것인데, 목판의 도드라진 새김이나 판화잉크의 물성이 지니는 딱딱하고 단조로운 질감을 피하고 먹이나 동양화물감을 써서 마치 한 폭의 문인화를 연상케 하는 방식의 전환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껏 판화 사에서 이러한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수인목판화의 제작은 여간 까다로운 방식이 아니라 한다. 단순 목 판각이나 소멸판각에 비해 공정과 기술의 어려움이 훨씬 더하고 시간도 많이 요구되어 국내 작가들이 잘 시도하지 않는 방식인데, 원래 중국에서 비롯된 이 양식적 접목을 통해 동안 의식적이었던 자신의 작업세계를 새로이 전환코자 어려운 시도를 감행하였다. 기법이나 형식의 실험, 변화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지만 작가란 그러한 변화를 통해서 자신의 창조성을 실험하고 모색하며 그 새로운 희망을 일구어 가는 존재인 것이다. 설령 이러한 변화가 지난 작업적 성과들에 비해 비교우위를 갖지 못하거나 다소 어설픔을 보인다 할지라도 이러한 태도는 지난한 작업의 과정 속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이를 통해 한층 성숙되며 예술가로서 분명한 자신의 모습을 정립해 간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이다. 동안 지역에서 작업하는 청년미술가들에겐 이와 같은 끊임없는 형식실험과 모색, 삶의 자세와 태도 내면의 자기 진정성을 향한 각고의 노력들이 부족했던 게 사실이다. 아니 그러한 실험을 시도하는 많은 젊은 작가들이 있는 것을 알지만 그들의 작업적 성과나 내용들이 지나친 비약과 수사에 그치고 공허한 몸짓으로 소비되는 것도 잘 안다. 사실 이번 전시에도 그러한 조급함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또 김수영의 시 <풀>을 이용한 억지스러움이 내비치기도 하며 관람자에 대한 배려가 고려되지 않은 아쉬움이 남지만 나는 작가 지용출이 수상기념전을 통해 보여준 변화의 모습이 반갑고 좋았다. 그러한 태도가 청년미술상의 수상과 목적에 합치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반가운 변화가 발전되어 소기의 목적을 이루기 바라며 더욱 성숙한 작가 지용출의 앞날에 대한 기대가 있다. 이번 전시는 제 10회 청년미술상의 수상자인 김성민(35)씨의 시상식과 함께 하여 더욱 뜻깊은 자리였다. 전시작가와 수상작가 모두에게 축하를 드리며 아울러 이 지면을 빌어 청년미술상 운영의 방식에 대해 지역미술인의 한 사람으로서 얘기하고픈 것이 있어 밝힌다. 지역의 어려운 경제기반 속에서 재단도 예치된 운영기금도 없이 매해 수상자를 선정하고 상금을 수여하는 일부 운영위원의 헌신적 노력이 소기의 목적과 결실을 얻기 위해선 상금을 주고 전시를 갖게 하는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지역미술의 건강한 담론이 형성되고 그것이 바람직하게 이 사회에 회자되게 하는, 그래서 목적하는 그 뜻을 제대로 이루기 위한 방식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축하와 술자리로 이어지는 소모적·비효율적 형식을 벗어버리고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행사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이 일구는 소중한 노력들이 지역사회에 건강하게 자리매김 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지역에도 많은 시상제도가 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 열심히 작업하는 작가들을 위한 자리가 더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각 상의 성격과 내용의 차별화가 이루어져야하고 그것을 통한 건강한 담론의 형성이 더 중요한 일이란 것이다. 전북청년미술상은 그 상이 갖는 의미가 각별하다. 청년이란 말이 그것을 담지 한다. 청년이란 그 사회의 허리이며 중심이다. 선배와 후배를 연결하는 세대가 의미하는 바의 분명한 얘기가 그 변별력의 중요성이 매해 새로운 작가의 수상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 조병철 | 1962년 김제에서 태어났다. 홍익대 미대를 졸업하고, 6회의 개인전과 60여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서신갤러리 큐레이터를 지냈으며, 전주대와 백제예대에 출강하고 있다. 현재 전주산조예술제 조직위원, 전주문화산업지원센터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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