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 | [서평]
식민 시대, 우리음악의 뿌리를 찾아서
최상화 중앙대 국악대학 교수(2005-01-06 11:35:11)
이 책은 일본의 음악학자인 타나베 히사오(田邊尙雄)가 35년(1921-1956)간에 걸쳐 조선과 중국음악을 현장 조사하여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음악기행문의 한글번역본이다. 원래 제목은 『중국·조선 음악조사기행』인데, 박수관씨가 번역본(갑우문화원발행)을 내면서 제목을 『조선·중국음악조사기행』으로 바꾸고 제목에 맞게 편집했다 한다.
우리가 이 책에서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할 대목은 조선의 '이왕직 아악부'에 대한 기록이다. 이왕직 아악부는 조선조의 왕실 음악기관으로서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립국악원의 전신이기 때문에 그 자료들은 대단히 중요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일제시대에 우리음악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서 대한민국 음악사에 한 부분이 오려져 나갔다 해도 과언이 아닌 지금 이 자료의 발굴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식민지 시대의 우리 음악의 족적을 찾기 위한 작업이 최근 몇몇 학자들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나 만만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고서를 뒤지고 옛 기억을 더듬어 얼기설기 엮고 있는데, 쉽지 않다. 옛 일을 기억하리라 짐작되는 몇몇 사람들을 찾아가 보기도 하지만 일제 식민지 시대의 행적 때문에 조심하는 분위기도 있고, 권번을 통하여 음악활동을 한 분들은 신분노출을 꺼려 입을 닫는 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식민 지배한 당시의 일본에 의해 수집된 음악자료들이 유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들 또한 식민통치와 관련, 여타의 문제로 없앴거나 외부유출이 금지 됐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일본주도로 이루어진 『조선 중국음악조사기행』이 책으로서 발간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한 것은 의미가 있다. 더욱이 이왕직 아악부의 음악제도, 악기, 의상, 춤 등 여러 중요한 음악내용과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측면도 함께 기록하고 있어서 일단 중요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그러한 중요한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이 책과 저자에 대한 평가가 한국 음악학자들 간에 논란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총독부를 설득하여 폐쇄직전의 이왕직 아악부를 구하고, 그 결과 현재의 국립국악원에 까지 아악의 맥을 잇게 했다, 때문에 당연히 타나베 히사오는 대한민국 음악사에 절대적 기여자로 평가해야한다'는 여론이 학자들 간에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다른 평가를 하고 있다. 타나베 히사오는 당시 일본 궁내성 악부의 아악연습소 강사, 다시 말하면 일본 국가 공무원이다. 그러한 신분으로 일본의 명을 받아 식민지인 조선의 음악을 조사한 것에 대한 저의를 의심한다. 또한 이왕직 아악부를 총독부 직계 산하단체로 이관하게 하고, 이왕직 아악을 튼튼히 보존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의 다른 음악, 특히 민속음악을 말살하는 결과를 노렸다’는 것이다. 즉 이왕직 아악부의 아악을 추켜세우면서 상대적으로 조선의 정체성이 살아있는 자생적이고 민중적인 민속음악은 없애버리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타나베 히사오의 최종 보고 내용이 최근에 밝혀지면서 이 책의 내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터나베의 아악관은 '…내가 조선음악에 대하여 조사한 것은 조선의 민족음악이 아니라 李王家의 雅樂이였으며, 이것은 중국음악의 한 연장인 것이다…' 라고 하여, '아악'은 바로 중국의 '아악'이라는 확고한 음악적 판단을 이 책의 서문에 밝히고 있다. 결국 '아악'은 조선의 음악이 아니라는 확고한 생각이다. 좀 더 그의 견해를 살펴보자. 저자는 이왕직 아악부를 자청하여 조사하게 된 동기를 '…동물원이라면 지금폐지 하더라도 필요하면 각국에서 동물을 사들여오면 언제라도 훌륭하게 부활시킬 수 있다… 그러나 아악과 같은 고전의 樂舞는 일단 사라지면 근절이 되고 만다… 나는 곧 조선에 가서 이것을 상세히 조사하는 것과 함께 그 보존이 필요함을 총독부에 진언하여 극력 그 폐지를 방지토록 노력하려고 생각한다' 라고 애써 밝히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야누스'적인 교묘함을 느낀다. 이 책이 발간된 해는 1967년으로 이왕직 아악부 조사를 한 해(1921년)로부터 46년 후이고, 해방(1945년)으로부터는 22년 후이다. 조사시점과 책 발간시점은 47년이나 차이가 있고, 그간 두 나라사이는 전혀 다른 관계로 변해 있었기 때문에 발간당시 책 내용을 약간의 손(?)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1921년 조사 당시로 돌아가 보자. 일본에서 조선의 경성에 도착한 타나베 히사오는 우선 이왕직 아악부를 찾는다. 폐쇄위기에 있는 이왕직 아악부의 관계자와 악생들은 마치 구세주처럼 그를 맞이했다. 그가 올 때마다, 그가 원하는 모든 음악을 연주하였다. 일요일에도 악생들이 출근해 그를 위해 기꺼이 공연을 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진동수 측정기로 편종 편경등의 악기 음높이를 측정하고, 활동사진기와 사진기로 공연내용들을 촬영하였다. 타나베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기들을 이용하여 기록을 할 수 있었고, 가는곳 마다 칙사 대접을 받았다. 당시에 타기 어려운 승용차를 이용하고, 일과 후 만찬에 초대받는 등 식민통치국의 권한을 최대한 누리며 조사를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아악'을 조사하면서 틈틈이 조선의 '민족음악(민속음악)'에 관심을 갖고 체험 조사를 하는 것이었다. 조사가 무르익을수록 조선 민족음악 (민속음악)에 온통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경성에서 꽤 유명하다는 기생집을 찾아 그들의 노래(경기잡가) 소리를 듣고는 아악과는 또 다른 조선의 민속노래에 크게 감탄하는가 하면, 단성사극장에서 창극(춘향전)과 기생들이 추는 검무, 북춤 등도 감상한다. 경성에서 만족 못한 타나베는 평양에까지 가서 여러 기생 음악 문화를 접하게 된다. 평양기생학교에서의 학생선발기준, 교육방법, 교과과정을 섬세하게 돌아본다. 대동강에서 동행한 총독부 경무국장이 직접 선별했다는 아리따운 당대 최고의 평양 기생들과 한배에 올라 조선의 노래를 감상하는 등 호화로운 조사기행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간다.
타나베 히사오의 귀국 직후 보고서에 의하면, '조선음악조사기행'은 일제의 당면 과제였던 일선융화(日鮮融和)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