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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 [서평]
스타일리스트 서정인 문체를 다시 본다
고규진 전북대 독문과 교수(2005-01-06 11:34:13)
얼마 전 반가운 책 한 권을 받아 들었다. 『달궁가는 길 - 서정인의 문학세계』가 그것이다. 반가웠던 이유는 우선 『철쭉제』, 『달궁』 등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소설가 서정인이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분이라는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가까이에 있는 덕진 호반촌의 한 귀퉁이가 그의 창작의 산실이다. 가까이 있었던 분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전북대학교 영문과에서 봉직하다가 얼마 전 정년 퇴임한 바 있다. 하지만 이 책이 진정한 반가움은, 그냥 편하게 얘기하자면, 평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될 만큼 읽기가 녹록치 않았던 그의 소설을 이제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같은 기대감과 맞물린 것이었다. 이 책을 엮은이가 전북대학교 영문과에서 서정인과 꽤 긴 세월을 동거동락하며 남다른 인연을 맺고 있는 이종민 교수라는 점에서도 믿음직스러웠다. 적어도 이교수라면 소설가 서정인 뿐만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서정택을 낱낱이 해부할 수 있는 특권(?)과 역량을 지니고 있을 터, 작가의 삶과 그의 사사로운 인간적 모습을 훔쳐보게 함으로써 시시콜콜할지 모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작품분석의 첩경이 되는 어떤 전기적 단초를 제공하는 것도 문학작품연구에 기여하는 훌륭한 방편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본론에 앞 서 학술서적치고는 약간 생경해 보이는 글을 배치하고 있다. 신광철의 ‘술친구 서정인’이 그것이다. 이쯤해서 독자들은 ‘머리말을 대신하여’에 토로된 엮은이의 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서정인의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보는 것이 애당초 이 책의 기획 의도였다는 것, 그러나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소신에서 개인 서정인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으려는 작가의 "방해"와 글을 아끼는 신광철 교수의 "깔끔 떪" 때문에 그나마 어렵게 ‘술친구 서정인’을 싣게 되었다는 것 등, 책이 나오기까지의 우여곡절이 아주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어찌됐건 ‘술친구 서정인’을 실은 엮은이의 의도는 성공적이다. ‘술친구 서정인’에서 묘사된 바와 같은 문학에 빠진 에고이스트로서의 서정인의 면모는 곧 바로 이경수의 글 제목 ‘고독한 에고이스트...’에서 다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크게 작가론과 작품론 그리고 부록으로 나뉘어 있다. 작가론에 해당하는 앞부분에는 2편의 논문이 실려 있고, 작품론 부분에는 총 14편의 글이 초기 단편집 『강』(1976)에서부터 최근의 장편 『용병대장』과 『말뚝』(2000)에 이르기까지 서정인의 작품세계로 안내하고 있다. 작가가 아직 활발하게 작품활동 중이기 때문에 작품론에 비해 작가론이 현저하게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피할 터이지만, 두 편의 작가론이 근작을 포함한 서정인의 작품세계 전체를 아우르지 못한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시대의 흐름에 따른 서정인의 현실인식을 관념적 인식, 단층적 인식, 다층적 인식으로 유형화하면서 이러한 인식은 각각 현실을 탐지, 포획, 해방한다고 진단하고 있는 조은하의 글(‘서정인의 문학관-리얼리즘을 중심으로’, 50쪽)도 작품론에서 다양하게 개진된 서정인 문학의 문체적 형식미를 함께 고려할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해학적 반어를 이용한 타락한 세계에 대한 비평적 진단(정호웅, ‘세계의 타락성과 근본주의적 세계관’, 224쪽 이하), 우울한 비관주의, 순환론적 역사관 등으로 요약되는 그 간의 연구성과들이 서정인 작품의 문체론적 낯설게하기에 대한 치밀한 분석 앞에서 왠지 공허해진다는 느낌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언어이다. 서정인은 언어, 특히 글이 아니라 말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에서, 요컨대 말에 신적인 지위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리얼리스트가 아니다. 그가 "혼돈에다 질서를 주자면 사실주의를 부술 수밖에 없다. 삶을 보여주기 위해서 삶을 깨트리고 문학다움을 과장한다"(『봄꽃 가을열매』의 작가 후기)라고 했을 때, 그의 작품이 생소한 어법을 차용하고, 다양한 정보들을 무질서하게 나열하고, 심각한 것과 사소한 것의 편가르기를 싫어하고, 상대적 가치의 경계를 허문다고 해서 전통적인 리얼리즘을 파괴하고 "새로운" 리얼리즘을 모색(임명진, ‘새로운 리얼리즘의 모색과 그 가능성’)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경우 오히려 그의 소설은 모더니즘적인 담화소설이 되며, 문학다움을 과장하는 것이야말로 문학에 절대적 위치를 부여하고자 했던 모더니즘의 특성과 부합된다. 그리고 이러한 모더니즘적 특성은 세계관적 관점에서 글을 매개로 현실을 구성하는 것을 포기한 대가이자 성과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럴듯함의 미학과 역사지평에 대한 요구로 집약되는 리얼리즘적 강박관념과 서정인의 작품을 애써 연관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스타일리스트 서정인의 문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글들은 읽는 이를 고문할 정도의 그의 난해한 문체와 언어유희를 친절하게 해설해주고 있다. 우리 소설은 서구의 소설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하며, 우리 소설은 우리의 육체를 가져야 한다는 작가의 신념은 그가 개척한 독특한 문체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예컨대 『붕어』의 경우 서정인은 "판소리 사설의 문체, 소리꾼처럼 작중 인물의 세계 안과 밖에 있는 서술자의 위치, 상황을 중시하는 판소리식 전개 방식"(김연호, ‘상황적 극 구조와 판소리 가락에 실린 쓴소리’, 264쪽) 등을 통하여 자신의 소설에 독특한 우리식의 육체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독자들은 자유 간접화법, 음성적, 통사적, 문체론적 낯설게하기 등의 개념을 이용한 작품분석을 통하여 서정인 소설의 문체에 대한 상세한 안내를 받게 된다. 서정인의 에세이 한 편과 다섯 편의 수상 소감이 수록된 부록은 이 책의 기획 의도를 보강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에세이 『왜 써』에서는 글쓰기가 끝없는 시도라는 것, 그것은 설명이나 해설이 아니고 탐험이고 방황(362쪽)이라는 서정인의 소신을 확인하게 되는데, 이러한 대목은 앞으로도 그의 문체적 실험은 계속될 거라는 믿음과 기대를 갖게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 책이 본격적인 작가총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더욱 더 생생하게 들을 수 있는 자료들이 더 많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는 엮은이가 서두에서 토로한 아쉬움에 공감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지만 독자나 연구자의 입장에서는 작가가 남긴 모든 글들이 다 소중하다. 하지만 이런 욕심은 훗날로 미루어두어도 괜찮을 것이다. 작가에 대한 엮은이의 "흠모의 정"이 계속되는 한 가까운 시일 안에 서정인의 삶과 문학을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보다 값진 자료와 연구성과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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