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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6 | [시사의 창]
[전북의 땅과 문화, 사람들 - 남원] 저항과 풍류가 배인 '꽃심'의 고장 남원의 역사와 문화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3-04-07 14:06:32)
'비옥한 토양이 백리에 이어져 하늘이 내려준 땅'. '옥야백리 천부지지(沃野百里 天府之地)'의 고장이 바로 남원이다. 옛부터 새로 시작하는 땅이라는 의미의 '태궁(胎宮)'으로 불려질 만큼 남원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정착되어 온 곳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전통문화의 진수라 할 판소리의 고장이면서 고전문학이 잉태된 땅. 지금까지도 남원이라는 도시적 전통과 정체성을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국악과 고전문학 등에서 찾고 있는 것이나, 이 두 축의 문화유산을 토대로 '춘향제'와 같은 굵직한 문화 정책을 수립해온 것도 이같은 전통적 자산에서 비롯된 것들이랄 수 있다. 특히 김시습의 『금오신화』에서 주인공인 노총각 양생이 만복사에서 부처와 저포 놀이를 해 이김으로써 부처한테서 처녀 귀신을 소개받아 인연을 맺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만복사 저포기」나 부연이 필요없을 만큼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춘향전』은 남원의 고전적 이미지를 한층 부각시켜 놓는 것들이다. 「만복사 저포기」가 변치않는 남자의 순정을 그린 소설이라면, 『춘향전』은 신분을 초월한 한 여인의 변치않는 순애보를 그린 작품. 두 작품이 모두 남원을 배경으로 쓰여져 세상에 알려졌다는 점에서 두 고전문학은 '사랑'의 도시로의 이미지를 확고히 새겨놓은 남원의 대표문화라 할만하다. 여기에 춘향가, 흥보가, 변강쇠가 등의 판소리 역시 남원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한(恨)과 불편부당한 사회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표출된 서민문화의 진수로 평가받고 있다. 남원향토문화연구회 전 회장 임명택씨는 남원을 상징하는 두 축의 대표문화인 판소리와 고전문학이 잉태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철저히 양반중심의 도시였던 남원이 계급사회에 대한 지식인들의 비판과 신분사회에 대한 서민들의 자각이 상호 교류해 왔기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이 지역 향토사 연구가들도 고구려 때부터 이른바 엘리트 계급이나 식자층들이 전란을 피해 멀리 남원 땅으로 유입돼 왔다는 사실과 통일신라 말기 국가의 구조적 모순과 부패한 정권에 대한 반기로 당시 개혁세력이었던 '선종'이 남원에 정착하게된 역사적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남원이 새로운 사상이 들어올 만한 사상적 '열린 공간'임을 반증하는 동시에 시대에 따른 지식인의 저항의식이 형성돼 무언가 새로움을 도모하는데 적합한 땅이었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한 지역의 문화와 인물, 역사적 사실이 가진 의미를 그 지역이 갖는 지형과 산세 등에서 그 근원적 유래를 찾아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남원 역시 예외이지 않다. 실제로 "살아서는 남원, 죽어서는 임실"이라는 말을 낳게할 만큼 남원의 산세와 자연조건은 풍요롭고 넉넉한 것이었다. 남원은 전라북도의 동남쪽 맨 아래에 위치해 동쪽과 서쪽, 북쪽에는 반야봉, 천황봉, 황산, 교룡산 등 소백산맥 줄기와 노령산맥의 여러 높은 봉우리가 겹겹이 솟아 있고 남쪽에는 넓은 들과 구릉이 펼쳐져 있다.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여러 물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낙동강 상류를 이루고 서쪽으로는 섬진강의 상류를 이루는데, 서쪽으로 흐르는 여러 물줄기가 합쳐져 남원 산동면에 이르면 제법 큰 물줄기인 요천이 된다. 요천과 적성강 유역에는 가방평야와 금지평야가 있는데 물이 넉넉하고 땅이 기름져 남원의 곡창 구실을 하고 있다. 여느 지역보다 빼어난 산세를 가진데다 산과 하천, 구릉 등이 조화롭게 자리한 덕에 남원 땅은 예로부터 사람들의 동경과 칭송이 높았던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한 예로 주천면 용담리 입구 용머리 산자락 바위에 '기상풍영 융중산수(沂上風詠 隆中山水)'라는 싯구가 새겨져 전해오고 있는데, 이 속에 숨은 뜻을 풀이해 보면 남원이 가진 천혜의 자연 풍광과 고향에 대한 남원 사람들의 남다른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이 싯구에서 기(沂)는 중국의 지명으로 경치가 뛰어나 풍월을 읊기에 알맞은 아름다운 곳을 뜻하고, 융중(隆中)은 제갈공명이 때를 기다리며 산수를 즐길 때 유비가 삼고초려를 했던 곳을 의미한다고 하니, 풀이하면 남원의 산수가 중국에 있다는 기(沂)와 같이 뛰어난데다, 제갈공명과 같이 때를 기다리는 숨은 인물이 많은 곳이라는 의미가 되는 셈이다. 이곳 사람들의 땅에 대한 애착은 만인의 총과 황산대첩 등의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된 뿌리 깊은 자긍심과도 맞닿아 있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 싸움을 통해 민·관·군이 일체된 모습으로 최후까지 국가와 삶의 터전을 지켜냈던 1만명의 혼이 깃든 '만인의 총'은 남원 사람들의 정신적 유산이자 구심점으로 비쳐진다. 남원향토문화연구회 임 전 회장은 "만인정신을 남원시는 물론 국가적 차원의 정신 계승 사업으로 확대, 승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벌여나가야 한다"며 "남북은 물론 동서가 분열된 상황에서 민·관·군이 하나로 뭉쳐 최후의 일각까지 국가를 지켜내려 했다는 점은 지금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강조한다. 고려 말 이성계가 남원에 들어와 황산대첩을 통해 전국 주도권을 잡은 계기를 마련하게 됨으로써 조선이 태동할 수 있었던 데에도 남원 시민들을 적잖은 의미와 자긍심을 실어놓고 있다. 여느 지역보다 풍부한 문화유산을 간직해 온 남원은 전통문화에서 비롯된 다양한 문화정책을 구사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을 간직하고 있는데, 넓게는 '국악의 성지'로서의 도시 이미지를 굳혀나가는데 역점을 두는 한편, 전통유산을 현대로 잇는 관광사업 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특히 국립민속국악원과 시립국악원 등 정부나 지자체의 든든한 후원과 더불어 사립학교인 남원국악 정보고, 사단법인 민속국악진흥회 등을 통해 명실공히 판소리를 중심으로 한 국악의 요람으로 대내외적 이미지나 성과를 내는데 진력하고 있다. 마을마다 자생적으로 생겨나는 농악단과 "국악이 없으면 행사가 안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퍼져 있는 것도 남원만의 독특한 현상이다. 다만 이곳의 젊은 국악인과 문화 관계자들은 남원의 보수 기득권 세력의 '울타리 주의'가 젊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지 않으려는 것이나, 남원이 국악 인재 양성을 위한 실질적 교육보다는 국악 상품화에 치중해 온 점 등은 장기적으로 남원이 가진 전통적 자산을 오히려 손상시킬 수 있다는데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남원 사람들은 스스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경향이 있다"고 평하고 있는데, 한편으로는 남원 사람들의 이같은 기질이 전통문화를 지켜오는 꼿꼿한 버팀목인 동시에 새로움에 대한 거부감으로 작용했으리라는 분석도 가능케 한다. 이렇다할 산업 시설이 없고 농업 생산력도 약한 남원으로서는 관광 산업이 가장 큰 부가가치를 지닌 경제 활동으로 인식되면서 남원 관광단지와 광한루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관광 정책이 문화 사업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남원시 관광 정책의 선두에 서 있는 '춘향제'는 올해로 71회째를 맞을 만큼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면서 전국적으로도 적잖은 명성을 얻고 있지만, 젊은 감각의 새로운 시도와 다양한 볼거리 마련이 장기적으로 준비돼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머무는 관광지'로서의 관광 인프라를 꾸준히 개발하고, 축제를 통해 주민들의 소득 증대를 꾀할 만한 문화 상품을 개발하는데 관의 적극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옛부터 서민문화의 발달과 함께 지식인들의 유입이 활발했던 고장이었다는 자랑 만큼, 지금 남원이 처한 인적 자원에 대한 꾸준한 박탈감은 남원 시민들의 가장 큰 고민이면서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몇해전부터 서남대 이전을 놓고 잡음이 일었던 것도 서남대가 남원에서 차지하는 상징적이고도 실질적 의미가 적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산업화·도시화 이후 지식인 계층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가운데 서남대가 들어서면서 전문성 있는 박사나 교수들이 겨우 자리를 잡고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남원 문화관계자들은 이들의 전문적 지식과의 결합이나 협조 없이는 남원이 가진 역사적, 문화적 비전을 찾기가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남원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시민들 전반에 깔려 있는 '서남대 이전 반대' 여론도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되는 부분이다. 저항과 풍류로 대변되는 '꽃심'의 고장, 남원은 최근 들어 명희의 소설 『혼불』의 무대가 됐던 사매면이 위치한 지역으로도 주목을 받고 있다. 한편에서는 소설의 배경지를 문학적 성지로 가꾸려는 계획들이 구체적으로 산출돼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지만, 무엇보다 남원이 간직한 '꽃심'을 사람 속에 심어 가기 위한 정신적, 정책적 구심체 찾기가 더욱 긴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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