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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 [한상봉의 시골살이]
인간에게 가까운, 그래서 두려운
한상봉(2005-01-06 11:27:26)
며칠 전에 두 달 동안의 여정을 마치고 작업실이 완성되었다. 처음엔 두어주 정도면 족하리라 여기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혼자서 주물럭 거리다 보니 몇 배의 시간이 더 걸렸다. 작업실은 글을 쓰거나 소품(小品)을 만드는 공간인데, 골방에 있던 책을 내오고, 작은방에 있던 장롱까지 이곳으로 옮겨다 놓으니, 의젓한 손님방도 생기고, 집안의 공간이 두루 넓어진 느낌이다. 시골생활은 제멋대로 공간을 짓고 줄이고 늘리고 바꾸는 데 묘미가 있다. 물론 적당한 눈썰미가 있어야 제 힘으로 적은 돈으로 공간을 재창조할 수 있지만 말이다. 매달 한쪽씩 나가는 <문화저널>의 원고 역시 처음으로 골방에서작업실로 옮겨앉아 쓰고 있다. 밤일을 주로 이곳에서 하게 되면서, 우리 집 강아지 호두의 잠자리로 바뀌었다. 예전엔 항상 큰 툇마루 밑에서 자더니, 이젠 작업실 문 앞에 좁게 놓인 툇마루에 아예 올라앉아 잠을 청한다. 간혹 작업실 문을 열고 나가려면, 꼭 문 앞에서 웅크리고 자던, 호두가 깨어나 뒤로 물러서곤 한다. 강아지들이 본래 사람의 기운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 집 호두가 유난히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녀석은 우리 식구들이 외출하고 돌아오면 펄쩍펄쩍 뛰면서 반기고, 특히 아내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나선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까운 짐승일수록 정을 주기가 겁이 난다. 이렇게 정을 주다가 덜컥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얼마나 상심(傷心)할 것인가? 그동안 닭을 키우면서 이래저래 죽은 닭을 대추나무 밑에 묻고 향을 올린 게 여러 차례다. 특히 갓 부화한 병아리들이 죽을 때는 마음이 더 안쓰럽다. 이런 저런 이유로 우리는 그동안 짐승을 키우길 꺼려하였다. 닭도 키운다는 건 닭이 죽는 것도 담담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사는 게 있는 게 죽은 것도 있다. 같은 병아리라도 건강한 녀석이 있고 유약한 녀석이 있기 마련이다. 삶에 그악스런 놈은 탱탱하게 살이 붙고 항상 밀리는 놈은 시들시들하다 제 명에 이승을 하직하지 못한다. 목숨 가진 것들의 불공평한 생애는 지금 살아 있는 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던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십년 만에 금지옥엽 아이도 생겨나고, 강아지도 오리도 키우게 되었다. 양육(養育)에 대한 열정이 솟아났는가? 금쪽 같은 아이, 살붙이처럼 따라붙는 강아지, 그리고 그보다 좀 멀게 느껴지면서도 여전히 마음이 쓰이는 오리와 닭은 모두가 한 식구가 된다. 항상 그들의 안부(安否)를 탐문하고, 먹을 것을 챙겨주고, 받아야할 기운을 받는다. 그에 비해서 아무래도 식물들은 다른 차원으로 다가온다. 그들의 안부가 결정적으로 마음을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물론 농사짓는 작물들이 망가지면 속이 타고, 아침마다 무 추에 달라붙은 청벌레를 잡아 주지만, 아직 도(道)가 낮아서인지 그들을 식구처럼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하물며 길가의 풀들에게까지 일일이 이름을 부르며 인사할 여력이 남아 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존재론적으로 생활적으로 먼 것일수록 그의 생사에 대하여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다만 가까울수록 때로는 안절부절하고 때로는 환희작약(歡喜雀躍)한다. 하지만 돌아보면 그렇다. 불가(佛家)에선 모든 게 나의 분별심 때문이라는데, 모두가 저 마다의 생애가 있고, 제 몫만큼의 길을 걷다가 사라질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아이조차도 나의 소유가 아니고, 그 아이의 고유한 삶의 궤적을 따라 걷는 것이며, 다만 부모란 곁에서 지켜 서서 지긋이 바라봐 주는 동반자일 텐데, 하는 생각 말이다. 사랑하되 끌어당기지 않고, 담담하되 밀어내지 않는 관계를 맺고 싶다. 그래야 내게 오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산천초목이라도 부담 없이 두려움 없이 맞이하고, 그렇게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날이 올 것인가? 언제 올 것인가? |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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