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 | [교사일기]
애들아,우리 겨울을 만나러 가자
한진희 무주 푸른꿈고등학교 교사(2005-01-06 11:22:10)
"선생님, 오늘은 어디 가요?"
미술시간마다 흔히 듣게 되는 "뭐 그려요?"라는 질문보다 훨씬 상큼하고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학교에서 미술시간을 운영하는 나는 올해 초 동아리 '여행스케치'를 만들었다. 아이들로 하여금 그린다는 행위-기술에 집착하기 보다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보고 이웃과 지역을 만나고, 나아가 세상을 만나는 작은 나눔을 갖고자 하였다.
'여행스케치'는 학교가 자리한 지역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을 여행하듯이 자연과 문화 역사 그리고 사람을 만나며 그림을 그린다. 1학년 한 명, 3학년 5명의 남학생 그리고 나 이렇게 여섯 명이 여행스케치의 요원이다. 매주 수요일 오후가 되면 여행용 화판에 각자의 스케치북, 연필, 수채색연필을 넣어 들고 나간다.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풍경을 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자연과 대화를 하게 된다. '여행스케치'활동에서는 개인의 소질과 그리는 방법적인 면을 크게 다루지 않는다.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하듯 즐긴다. 그러다 자신의 표현에 감탄하기도 하면서 표현의 기술적인 면은 금새 하나씩 배우게 되는걸 볼 수 있다. 나는 주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곤 하였다.
그림 1-가을을 만나다
학교를 나서 길을 걷자면 들녘을 만나게 된다. 이곳은 산이 많아 김제나 부안에서 볼 수 있는 지평선 대신 아름다운 산의 능선을 가까이 하게 된다. 그래서 들녘은 크지 않고 소박하게 펼쳐져 있다. 아이들과 함께 학교 앞 들녘을 만나러 갔다.
그리 넓지 않은 논둑길을 걷다 자리를 잡아 '들녘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들녘은 자연의 순수한 아름다움과 더불어 인간의 노동이 들어가 아름다운 '자연'을 만나게 해준다. 더군다나 이곳은 농약을 쓰지 않으면서 땅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 땀을 흘리고 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들녘이다. 푸른꿈고등학교의 탄생과 더불어 이 지역은 환경농업마을로의 전환을 꿈꾸고 있다. 생태교육 이념을 지향하고 있는 푸른꿈은 지역과의 유대관계가 좋고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서로 필요한 일에 도움을 주고받는다.
요즘은 손수 낫질을 해서 벼를 베는 일이 드물고 트랙터를 이용해 추수를 한다. 논바닥에 지나간 트랙터 자국에서 가을을 보는 아이, 무농약으로 탐스럽게 열린 빨간 사과 열매에서, 논둑길가에 서서 하늘거리는 강아지풀에서도 가을을 만난다. 아이들의 소박한 그림은 내가 보지 못한 가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읽기에 충분하다. 저마다 자신의 심리상태와 무관하지 않게 가을이 다가옴을 볼 수 있다.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아이는 트랙터자국에서 짓밟힌 땅의 아픔을 표현했다. 마치 자신의 상처를 공감하듯이 어루만진다.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는 아이는 바람에 흔들리는 강아지풀에서 가을을 읽는다. 들풀에 지나지 않는 강아지풀이지만 부드러운 느낌으로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섬세한 표현을 하고 있다.
마음이 열려야 자연을 느낄 수 있고, 마음이 열려야 주위에 어려운 사람을 볼 수 있고, 마음이 열려야 세상을 함께 할 수 있다. 교사는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마련해 주고 나누는 친절한 벗이 되어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얼마나 흥미롭고 창조적인 시간인가. 아이들은 이런 나를 보고 혼자 감동하고 혼자 신이 나있다고 놀려대기도 한다.
그림2-구량천을 그리는 아이들
덕유산 칠연계곡 작은 샘으로부터 흘러 구비구비 돌아 용담댐에 잠시 머물다 금강으로 글러 서해로 이어지는 '구량천'은 학교 앞 마을을 끼고 유유히 흐르고 있는 물줄기이다.
훌륭한 교육공간이자 쉼터가 되어 주는 구량천은 작년에 태풍 루사의 피해 이후 수해복구라는 명목으로 지금껏 많이도 파헤쳐지고 모양도 바뀌었다. 작년 한 해 동안 수질측정 및 하천 생태조사를 위해 아이들과 함께 매 주 찾아온 구량천을 올해 여름 다시 만나러 갔다. 스케치북을 펼치고 자리를 잡은 후 잠시 물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하루종일 어떤 소리를 듣고 사는가? 도시와는 확연히 다르게 이곳에서는 정겨운 소리를 들으면서 생활하게 된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 자연이 주는 싱그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신의 축복 같기도 하다. 현대인들을 위하여 피로를 풀어주는 자연의 소리 CD가 발매되어 나오기도 하는데 그 음향이 어디 자연의 순수한 소리만 할까. 자연을 되살리면 될 일을 기계에 의존하며 복원하여 상품화하려는 현상을 여기저기서 만나게 되어 안타깝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리며 확인하고 느끼게 된다.
"그 때랑 지금이랑 물 색이 많이 바뀌었네. 쉬리도 살았었는데.. 흙탕물이 흐르는 지금도 살고 있으려나? 자연의 재앙이 무섭다는데 태풍 때문에, 인간의 편의 때문에 쉬리들이 죽어야만 할까? 쉬리들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자신이 그린 구량천 그림과 함께 쓴 한 녀석의 이야기이다. 흐르다 돌덩이에 부디쳐 거세지는 물살, 하늘을 닮지 않은 물 빛을 그리며 아이들은 하나같이 예전의 구량천을 그리워하곤 하였다.
푸른꿈에서 지역은 학교 밖의 훌륭한 배움터이다. 아이들이 많
은 교감을 갖고 그 안에서 소속감을 갖고 역할을 찾을 수 있도록 프로그램화하는 것은 학교-교사의 몫이라 하겠다.
'여행스케치'는 아이들이 그 동안 발품 팔아 익힌 학교 주변 마을의 지도를 그리거나, 안성 5일장에 펼쳐지는 시골 장날의 정겨움을 그리기도 하고, 지역의 문화유산을 탐방하여 그림을 그리며 지역을 새롭게 만나기도 하였다.
지난주에 펼쳐진 예술제에서 '여행스케치'는 그 동안의 그림과 이야기를 모아 전시를 하고 작은 책자로 엮어 선을 보였다. 그야말로 여행하고 스케치하듯이 그려내고 써 왔던 작품이 전시되니 아이들은 제법 뿌듯해 했다. 올 해 태풍 매미로 쓰러진 나무 한 그루를 이용해 나무 메모꽂이를 만들어 올해 예술제 주제인 '불우이웃을 돕는 정 나누기'에 함께 하였다.
겨울방학을 맞기 전 '여행스케치'친구들이 "다음엔 어디로 갈까요?" 하고 질문을 던지겠지.... 봄, 여름,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고 있잖아. 애들아, 우리 겨울을 만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