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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 [문화저널]
'한개 새끼도 아롱다롱이라고'
김규남 방언연구가(2005-01-06 11:20:40)
'개'는 어떤 말에 사용되든 대체로 볼썽사나운 존재로 등장하는 게 보통이다. 기실 개를 소재로 한 욕설은 비일비재하며, 어떤 상황이나 일이 추스릴 수 없을 만큼 흐트러져 있을 때도 '개'를 운운하기 일쑤이다. 화투놀이를 위한 신종 개그 '똥개도 홈그라운드에서는 오점 먹고 들어간다' 정도가 그나마 '개'를 대우한 말하기라 하겠지만 여기서도 그 '액상한' 우리의 '똥개'는 여전히 비하의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까닭은, 윤리 특히 성적 도덕성을 중요하게 여기던 우리 사회에서, 아리따운 아낙이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조신한 사위로 지나가든 말든, 아비와 딸이 모처럼의 봄나들이를 하든 말든, 녀석들은 몸이 시키는 대로 아무 거리낌없이 아무 데서나 발칙하게 흘레 붙곤 하던 데서 비롯되는 듯싶다. 낯부끄러워 고개를 돌리든 발길질로 녀석들을 떼어놓든 해야 할 상황이 마을마다 흔히 있었을 일이니, 절제의 미학을 생명으로 여기던 사회에서, 녀석들의 이러한 행위는 극단적으로 천박하고 몰염치한 짓으로 낙인찍혔을 것이며 그로 말미암은 개 같은 놈들로서의 확고부동한 지위는 언어적 질서 속에 주홍 글씨로 남게 된 셈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개에 대한 보편적 정서가 바탕에 깔린 상황 속에서 '한 개 새끼도 아롱다롱'이라는 표현은 매우 신선한 속담이다. 띄어읽기 신경 써서 말하고 써야 할 이 말은 김제 용지에서 태어나 백산에서 일생을 사시며 아들딸 잘 길러 작은 체구로도 '아금박지게' 살아오신 황 아무개 할머니께서 자식이 여럿이어도 모두 제각각의 성정과 소질로 살아간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던지신 표현이다. '마룽' 밑에 강아지 여럿 낳는 것을 일상에서 보아 온 사람이라면 이 말로부터 다가서는 지시적 의미의 정확성과 그 정황의 향토적 정감 때문에 깜짝 반가울 일이다. 게다가 어휘의 배열과 탁월한 선택, 그로 말미암은 말의 호흡을 고려해 본다면 이는 가히 시적 감각에 비겨도 서운치 않을 완벽한 언어 구사라 할 만하다. '한'과 '개'는 조금 긴 소리로 각각 말해야 하기 때문에 뒷말의 첩어 '아롱다롱'과 호흡의 짝을 이루며, '새끼도'와 '이라고'는 세 음절 씩 짝이 되어 운율을 살려 말해 보면, 그 호흡의 절묘함에 감탄하지 않 을 수 없다. '아롱다롱'이란 어휘 역시 개를 소재로 할 때 자칫 빠질 수 있는 이미지의 늪을 건너 뛰어, 허리 굽히고 '마룽' 밑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감때사나운 어미 개 밑에서 숨쉬기조차 힘겨워 하는 그 여리디 여린 것들의 등판에 새겨진 아롱다롱 무늬에 상상의 시선을 오래 머물게 한다. 바로 그 상황에서 '내 강아지'가 나왔음직하다. 애정의 깊이를 측량할 수 없게 온 몸과 마음으로 날마다 새록새록 샘솟는 사랑을 퍼 담아 주시던 할머니들은 으레 그렇게 '내 새끼 내 강아지'를 불렀을 것이다. 아무렇든 우리가 땅과 멀어지던 그 어느 순간부터 개도 우리의 생활에서 뒷전으로 밀리고 지금은 순직 후 온 몸으로 보시하거나, 애완용으로 봉사함으로써 자연적 존재로서의 삶의 가치를 그로 이양하고 난 후부터는, 개와 관련된 말들 또한 이전 시기에 생성된 의미 이상으로 새로운 단어 형성에 참여하거나 속담 형성의 소재가 되지 못하고 있다. 공유된 체험이 말의 생성과 성장을 위한 결정적 토대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 감칠 맛 나는 말도 사라질 운명에 처한 것은 아닐는지. 게다가 이 말이 '한 어미에서 나온 강아지들도 다 다른 것처럼'으로 혹은 ‘There are even differences among the young of a parent dog’으로 바꿔 말해도 뜻이야 통하겠지만 그 정감이야 어디 비교나 할 수 있겠는가. | 방언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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