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 | [문화저널]
정들었던 것들, 그리고 깊은 가을에게
박남준 시인(2005-01-06 11:18:52)
이사, 마당을 쓸고 돌아서는데 선뜻 발길이 떼어지지 않는다. 낡고 허물어져 가는 빈집을 고치고 모악산방이라 이름 붙여 살던 곳, 내가 처음 이곳에 살기 전에 빈집이었듯 다시 홀로 빈집으로 남아 누군가를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이란 언제나 떠나가는 자의 것이 아니라 남아있는 이의 몫이므로.
잘 있어. 가끔 들릴거야. 개울에 사는 버들치와 다슬기, 사람들이 다 잡아가지 않도록 잘 지켜 줘. 개울가 오동나무가지에 구멍을 파고 사는 겁 많은 청딱따구리 둥지도 찌르레기들이 빼앗지 않도록 보살펴주고 말이야. 윗샘에 사는 가재들도 가끔 굽어 보아줘.
봄이 되면 찾아올 꾀꼬리와 파랑새 그리고 검은등뻐꾸기에게도 잊지 않고 꼭 전해 줘. 눈 쌓인 겨울이면 이따금 마당 앞을 기웃거리는 너구리에게도, 키우던 닭을 모조리 잡아먹고도 모자라 툇마루 앞에 다가와 빈 참치 통조림 깡통을 달그락거리며 먹을 것을 내놓으라고 때를 쓰던 노랑족제비에게도 안부를 전해 줘. 나 이렇게 떠나가지만 잊지 않고 있다고 말 전해 줘. 정들었던 것들 뒤돌아서 내려오는 길 자꾸 눈에 밟힌다.
그렇게 떠나왔다. 굽이굽이 고개를 넘고 남원, 구례 지나서 하동 가는 길, 잔물결 여울지는 섬진강 길 따라 하얀 억새꽃들 바람결의 춤을 추는 지리산의 남쪽 산자락 악양 땅으로 이사를 왔다.
남쪽으로 왔으니 겨울이 따뜻하겠지. 낯설지 않고 편안하다. 무엇보다 해가 나는 날이면 하루종일 마당 가득 해가 들었다. 하늘도 한아름이나 더 넓어 보이며 밤이면 그 하늘에 별들이 자욱하도록 반짝였다.
그런데 모악산에서는 꿈도 많이 꾸고 했는데 여기 와서는 꿈을 한번 꾸지 못했어. 그래도 시를 쓰는 사람인데 꿈을 꾸지 않는 시인이라니 이거 잘 못된 것 아닐까. 꿈을 잃어버리고서야 어찌 시인이라 하겠어.
이른 아침 뜰에 나서면 무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려 있어. 곧 겨울이 오겠지. 바람결에 구르는 낙엽을 보며 문득 그래 저렇게 가벼워져야 비로소 거름으로 돌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 저 낙엽에 비하면 내 몸과 정신은 얼마나 헛된 욕망으로 가득 무거운 것인지. 보고싶다. 모악산방 빈집은 어찌 지낼까. 떠나온 것들이 그립다.
흔들리나 그마다 흔들리지 않고 먼바다로 가는 종이배처럼 나 또한 흔들리며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여기 지리산 악양의 깊은 가을, 그럼 안녕.
4336. 11. 남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