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 | [문화저널]
사회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뜻,영원히 가슴속에..
하춘자 익산 가정폭력상담소 소장(2005-01-06 11:15:18)
어느해 가을, 이젠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기억 속을 더듬어 봅니다. 가을의 울긋불긋 옷을 입은 산천은 우리를 반기듯이 너울너울 춤을 추었지요. 그 속에 동화된 우리 회원들은 각박한 현실 속에서 맞고, 터지고, 분노에 몸부림치던 숱한 여인들의 호소에 찌들었던 심신이 확 풀리는 듯 하였고요.
'우리 오기 참 잘했다.' 일상 할 일도 많은데 무슨 단합대회냐고 찬반이 분분했던 터라 이런 아름다운 자연에서 우리 다시 힘을 얻어보자고 간곡히 제의한 그녀의 뜻으로 위봉사를 다녀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녀는 가을색깔로 담뿍 물든 오솔길에 취해서 무언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잔잔한 감동이 일어난 듯 보였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녀는 갈대밭을 걸으면서 연애시절 김 교수님이 가을 들판에서 멋진 노래를 불러 주었던 일을 회상하며 양팔을 벌리고 흉내까지 내가며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있었지요. 그때 자신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며 얼마나 행복했었나를 이야기할 때 옆에 있던 회원이 함 선생을 더할 나위없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시절 어머님께서 일찍 돌아가시고 받았던 상처를 이야기 할 때는 당신의 가상함에 위로를 받았지요. 그리고 일년에 한두번 김교수님의 시골 초등학교 동창들의 부부모임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녀올 때마다 재미있게 들려주었지요. 어느 장로님은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기 위해서 아무리 먼 거리라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가 밤중에 집으로 가신다는 이야기 등등…
해마다 들려주었고 내년에도 들려주리라고 믿었던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도 이젠 기억이라는 창고 속에 저장해 꺼낼 수밖에 없어 마음이 메어옵니다.
51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가셨지만 우리들의 마음에는 영원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1997년 전북여성의전화(현 전주여성의 전화) 공동대표를 하면서 함 선생은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었지요.
'전북여성의 전화에서 9년째 일 해오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소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이 개인적으로 큰 보람이었고, 작은 마음과 힘을 모아 이 사회에 보태고자 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언제나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 누가 보아주지도 않고, 인정해 주지도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일에는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 필요하고, 많은 인내가 요구되기도 합니다.'
'끊임없는 싸움과 많은 인내'. 이것은 함경숙 선생의 인품의 표현이었습니다.
1990년 초 김모교사 성폭력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청소년을 가르치는 신성한 교육현장에서 교장에 의해 여교사가 협박과 위협 속에서 강간당해야 했던 정읍 태인여중 성폭행사건으로 피해자는 1년여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성폭행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용기를 내어 고소한 사건이었습니다. 처음 가해자는 증거가 미약하다는 이유로 무죄선고가 내려져 강간이 아니라 화간으로 사건이 전개되어 피해자는 이중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여성단체 특히 여성의 전화 함 선생이 맡아서 일을 처리하게 되었는데 옆에서 지켜만 보는 나 자신에게도 인내가 필요하게 만든 사건이었지요.
3여년를 끌면서 진행된 이 사건은 정읍이라는 지리적으로도 먼 곳을 하루가 멀다하고 가 보아야하는 거리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가해자의 부인과 맞서 싸워야하며, 더욱이나 가해자가 사건 처리를 하는 동안에 자살을 해 버려 더욱 난감하게 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오랜 투쟁의 과정에서 피해자인 김교사가 심한 정신적인 충격과 상처로 몇 차례 삶을 포기하려하여 함께 하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할 뿐만 아니라 의욕을 상실케 했으나 함 선생은 이것을 끝까지 견디어 내어 결국 김교사가 복직하게 하고 마무리지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끊임없는 인내의 표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 여성의 전화는 전화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특수성 때문에 일회 상담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함 선생의 인내의 성품을 보여주는 상담 사례는 상담부장으로 일할 때 이루어진 한 여인의 일을 5년 넘게 지속적으로 도와주었던 일화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것은 같은 상담자들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저는 30대 후반으로 자녀 2명을 둔 결혼 15년 된 주부로서 결혼전부터 영어교사를 하였습니다. 남편은 일류대학을 나와 일류회사에 다니고 있습니다. 신혼초부터 끊임없이 외도를 해왔는데 이번에는 좀더 심각한 것 같습니다. 저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남편을 도저히 포기 할 수 없습니다. 참아내면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이렇듯 괴롭습니다. 울분이 날 때마다 여성의 전화에서 감정을 정리하고 남편에게 잘 대해 주었더니 요즈음 외박이 줄어들고 남편의 태도도 많이 변화되어 이젠 되었나보다 했는데 지난 며칠전부터 계속 외박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계속 되풀이되는 여인의 하소연에 변함 없이 상담을 하는 함 선생을 저는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남편의 지속적인 외도에도 불구하고 오직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숨죽이고 기다리며 고통받고 있는 내담자를 생각하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돌부처도 감당 못하는 감정을 감당하고자 노력했던 내담자에게도 찬사를 드립니다. 이런 경우에 많은 내담자들이 어떻게 할까? 라는 질문을 해오지만 개개인의 의지와 가치관에 따라 많이 달라지며 강요할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만일 이혼할 의사가 없다면 남편이 어떤 태도로 대한다 할지라도 대화와 사랑을 호소하며 설득해 가는 끈질긴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가정분위기 또한 남편으로 하여금 내 집이 편안하구나 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내담자는 결국 이혼을 선택했었습니다. 내담자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다정다감한 분위기를 연출했음에도 불구하고, 외도라는 마약과 같은 환락에 빠져있는 남편이 감동을 받지 못했지만, 함 선생은 남편의 잘못된 가치관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 보다 내담자가 이혼이라는 현실에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이혼 후 내담자의 삶과 자녀의 삶 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끝까지 배려했던 모습은 바로 함 선생이 지닌 지난한 인내의 성품 때문이었지 않나 싶습니다.
암으로 절제수술을 받고도 3년여 동안 열심히 일을 하셨습니다. 재발의 판정을 받았을 때는 주변 정리를 깔끔히 하였지요.
약물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는 듯 치료를 거부했고, 자신의 마지막 이미지를 곱게 남기기 위해 타인과의 만남을 거절하며 고고히 자신의 고독과 투쟁하였지요.
이런 그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에 절절한 애절함이 남습니다.
함경숙님은 갔지만 우리들의 마음에는 생 머리를 찰랑거리던 애잔한 모습이 영원히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사회에 보태고자 했던 작은 힘이 이제는 아니, 미래에는 보다 더 큰 사회의 변혁으로 다가올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