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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 [문화저널]
가슴에 남은 마지막 만남
김갑수 연극배우(2005-01-06 11:01:56)
가을이 한참 무르익어 가던 10월 하순 어느 날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광장에서 故 김상열 선생님의 영결식이 연극인장으로 치러지고 있었다. 나는 연극계 후배이며 그분의 수재자 격으로 영결식의 사회를 맡아 진행하며 한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추려고 애쓰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50대 후반의 짧은 생을 마감하셨던 그 날이 벌써 5년이나 흘렀다. 故 김상열 선생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해주신 가장 소중한 분이다. 내가 연극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분을 만났는데 내가 만약 그분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지금 어떤 연기자가 되어 있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 당시 연극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배우가 되겠다는 생각만으로 그냥 무대 위에서 폼잡고 좋은 목소리로 멋있게 연기하면 잘하는 것인 줄만 알고 있었던 때였다. 아무 생각 없이 덜렁덜렁 연습실을 왔다 갔다 하던 그때 그분을 만났다. 다른 극단에서 연출을 하시던 그분이 내가 소속되어 있던 극단으로 처음 작품을 연출하러 오셨던 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 벌써 25년 전이다. 그 분의 가르침은 간단했다. "무대 위에서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하게 연기하라"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단순하고 우리가 평소에 알고있던 얘기였다. 그런데 자꾸 들으면 들을수록 나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내가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실하라", "살아있어라",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나는 지금까지 연기를 하면서 진실한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이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나 자신도 진실하기 어려운데 어찌 다른 인물을 표현하면서 진실하기가 쉽겠는가. 내가 맡은 인물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통 속에 보냈는지 모르겠다. 진실성이 부족한 인물을 표현 할 때, 그런 연기를 보시면서 연출로서 괴로워하시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거칠지만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무대 위에서 펄떡펄떡 뛰며 용솟음 치는 연기를 보고 싶어 하셨다. 맡은 배역의 인물을 다른 연기자와 같지 않은 나만의 인물을 만들기 위해 밤을 새고 미친 듯이 노력하였다. 그만큼 故 김상열 선생의 훈련은 혹독했다. 한번은 내가 맡은 배역의 인물이 만들어지지 않고 나를 괴롭힐 때였다.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연습실 옥상에 올라가 옷을 모두 벗고 혼자 연습을 한 적이 있었다. 벌거벗은 채로 구르고 뛰고 기어다녔던 그때가 가끔 생각난다. 그 당시 연극에 거의 미쳐서 집을 뛰쳐나와 극단 연습실을 전전하며 먹고 자던 때가 아직도 얼마전인 것처럼 기억난다. 빵 하나와 우유 한 병으로 하루를 지내던 시절, 추운 겨울 차가운 연습실 마룻바닥에서 새우잠을 자고 새벽에 포스터를 붙이러 다니던 시절, 그러면서도 목마른 나의 내면을 채우기 위해 음악 감상실로, 미술관으로, 영화관으로, 외국문화원으로, 연극 공연장으로 정신 없이 뛰어다니던 시절, 故 김상열 선생은 일상에서 배우랍시고 아무 생각 없이 잘난 척 하며 거리를 활보하는 연기자를 가장 싫어하셨다. "연기자는 일상이 아니라 무대에서 빛나야 한다"고 우리를 질책하셨다. 연습하다 말고 이발소에 가서 긴 머리를 하얗게 밀고 나타나서 미친놈 소리를 듣던 나였다. 그래도 연극이 좋았고 연극이외에 아무 것도 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故 김상열 선생이 보고싶다. 80년대 후반 그동안 연극을 열심히 했던 보너스였는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할 기회가 오면서 경제적으로는 그 전보다도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연극처럼 끊임없이 인물을 연구할 시간이 부족하다. 방송일정도 맞춰야 되고 여러 가지 스케줄이 있기 때문에 상당히 바쁘다. 일을 하면서도 연극 할 때와 다르게 무엇인가 허전하고 무엇인가 놓쳐버린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가끔 그분을 찾아갔다. 삼겹살에 소주한잔 하면서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고 나면 마음이 훨씬 안정되고 제 정신이 돌아오는 느낌이 되곤 했다. 곶감 빼먹듯이 나의 능력을 써먹기만 하고, 다시 채워 넣지 않으면 결국에 가서는 평범하고 하찮은 배우가 될 것이라고 강조 하셨다. 故 김상열 선생과 함께 극단 '신시'를 창단하고 창단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분이 워낙 많은 일을 하시면서 예를 들면 뮤지컬, 악극, 국가 행사 개폐회식 등을 연출하시며 원래 시작했던 연극을 소홀히 하게 되셨을 때 나는 그 분과 헤어져 극단 '배우세상'을 창단 하였다. 헤어질 때 갈등도 많았고 말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연극을 해야만 했다. 결국엔 극단 창단을 허락해 주셨고 축하까지 해 주셨다. 그 이후 그 분을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는데 어느 날 병원에 입원을 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나를 보고싶어 하신다는 연락이 왔고, 나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밤에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 분은 혼수상태에 계셨다. 병명은 '췌장암', 나는 깜짝 놀랐다. 그토록 열정적이고 활동적이셨던 분이 이게 웬일인가? 혼수 상태에서 잠깐 깨어 나셨을 때 병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은 너무나도 가슴 아팠다. 건강하셨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고 저 분이 정말 김상열 선생인가 싶을 정도로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모습이었다. "선생님 저 알아보시겠어요, 갑수입니다" "어, 갑수왔냐? 그래 열심히 해!" "네, 선생님" 그리곤 다시 고통의 신음 소릴 내시면서 혼수상태에 빠지셨다. 그게 다였다. 20년을 같이 연극을 해왔던 나의 선배이자 가장 큰 스승은 그렇게 짧은 말을 남기시고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나셨다.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주셨던 분, 지금까지도 나를 지탱케 해주셨던 분, 나의 정신적인 지주요 연극의 동반자이셨던 그 분과의 마지막 만남은 너무 짧았다. 허망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러나 故 김상열 선생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살아 계신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나에게 말씀하신다. "무대에서 진실해라, 살아 있어라, 그리고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고 요즘같이 표피적이며 감각적이고 인스턴트 같은 문화가 대중들을 향해 목소리를 키우고 있을 때 "끊임없는 자기 반성과 철저한 연극자세"를 외치셨던 그 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나의 스승은 50대의 짧은 생을 마치셨고, 나는 이렇게 살아있다. 살아있는 내가 할 일은 아직도 많은데 아쉬운 것은 허전할 때 내가 갈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아쉽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무심히 창 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김갑수 | 1977년 극단 현대극장 연구생 1기로 연극계에 입문했다. 1987년 극단 ‘신시’ 창단멤버로 참여했으며, 현재 극단 '연극세상' 대표로 있다. 연극 <님의 침묵>을 비롯해 <사람의 아들> <아일랜드> <세일즈맨의 죽음>과 영화 <태백산맥> <지독한 사랑> <똥개>, TV 드라마 <찬란한 여명> <태조 왕건> 등 다수의 작품에 출연, 배우로서 굳건한 입지를 다져왔다. 1984년 오영진연극상, 1991년 서울연극제 남자연기상, 1995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주연상, 2003년 일본영화비평가협회 아시아친선상 등을 수상했다.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는 이달의 필자가 다음 필자를 추천하면서 바통을 이어갑니다. 이달의 필자인 연극배우 김갑수씨는 김제자활후견기관 김영배 관장을 추천했습니다. 김갑수씨와 김영배 관장은 개인적 친분을 쌓아온 사이로 최근엔 빈곤계층의 문화적 소외를 해소하기 위한 전국 연극 순회공연을 함께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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