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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 [문화저널]
어떻게 문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양예숙 전북대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생(2005-01-06 10:59:41)
「문화저널」의 16주년을 축하합니다. '문화저널'이란 이름으로 전북의 문화판을 조명하고 일궈 온지 어느새 15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시간동안 문화저널은 완벽한 홀로서기를 이뤄낸 듯 싶습니다. 더불어 전북지역의 문화지수를 나날이 두텁게 한데에 단단히 한 몫 했음을 누구도 부정하진 못할 겁니다. 80년대 후반 창간당시 '문화'라는 말이 어디쯤에 있었을 지, 어렸던 저에게는 감이 오질 않습니다. 문화저널을 일궈낸 사람들의 흔들리지 않은 초심이 있었기에, 일찍이 전북의 문화 읽기에 들어서서 지금의 전북 문화를 기록한 유일한 잡지로 자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화라는 대상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면서 점점 문화를 통해 감동을 주고받기가 더 어려운 시대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녹록한 연륜의 문화저널도 그 부분에서는 예외일 수 없을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문화저널은 전북의 문화 정체성을 그야말로 올곧게 기록해왔고, 여러 선진적인 기획사업과 문화프로그램 등을 통해 다양한 문화인력과 현장을 키워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양적인 축적을 통해 문화라는 버전을 보여주기보다 '어떻게 문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적인 고민에 이르러야 할 때라고 봅니다. 그런 고민의 언저리에서 문화저널과 나누고픈 바람을 시작해 보려합니다. 먼저 올 가을 아주 감동적인 콘서트를 만났던 이야기로 제 바람을 나눌까 합니다. 아주 뜻밖에 광주영상예술센터(전남)에서 내놓은 기획공연 '포엠 콘서트'를 보게 되었습니다. 시를 주재료로 음악·미술·연극·영상 등이 한데 어우러지는 퓨전 무대였고, 마침 제가 찾은 날의 콘서트는 박남준 시인(모악산에서 기거하며 연달아 시집과 산문집 등을 내고 지금은 경상도 악양으로 먼 이사를 가 버린 시인)을 위한 자리였습니다. 그날의 공연은 무엇보다 중요한 기본을 잃지 않고 시의 정수를 잘 살려내고 있었습니다. 작은 소극장 무대를 연상케하는 입구에는 낡은 시집과 닮은 리플렛이 기다리고 있고 무대로 이어지는 작은 촛불의 안내를 받아, 좌석에 앉아 펼친 책자에는 오묘한 시와 그림의 엽서가 꽂혀 있었던... 또 한 달에 한번 정기 공연을 준비하는 기획자의 세심함을 공연 내내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서로 다른 장르의 영역들이 조화를 이뤄낼 수 있을까'를 고심한 기획자의 힘. 그 새로운 고민의 역력함이 발랄한 전환점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요. 시를 콘서트의 주재료로 삼고 이런저런 모습으로 변형시켰지만 결국 시를 느끼는 감성을 져버리지 않은 연출과 기획의 그물망 같은 짜임새. 그런 기획자의 힘이 오래 전 시와 시인은 영상과 다른 무엇과도 섞일 준비가 되어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남겨주었습니다. 오랜만에 전북문화예술전문지를 표방하는 문화저널을 넘기면서 참 많은 변화를 담아내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문화저널이 고민의 깊이를 더하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항상 아래로부터의 기획을 염두하고 조곤조곤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준비를 하고 있는 필자를 찾아 나서고. 그런데 문화저널이 주관하는 정기 행사도 여전히 만만치 않게 많구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는 이제 문화저널이 전북의 문화정수를 제대로 보여줘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많은 문화공간들이 생겨났지만 공동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북지역에서 많은 행사가 열리지만 즐거운 감동의 무대로 기억되는 공연이 눈에 띄지 않습니다. 많은 공연이 적당한 마인드로 포장되어 유사품으로 대량생산되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결국 이구동성 문화마인드가 부족하다고만 합니다. 그래서 문화저널에 바람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문화저널이 올곧은 전북의 문화기획자가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이제 전북의 정서와 감성을 아는 그 마인드가 잡지 안팎으로 오갈때가 아닌가, 섬세한 문화기획자가 될 수 있는 자산이 충분하지 않느냐고. 16주년 문화저널에게 이제 이런 주문을 하고 싶습니다. 문화저널, 어떻게 문화를 나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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