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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 [문화저널]
착한 노래를 부르는 남자들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5-01-06 10:33:50)
석양이 물들어 가는 호남고속도로 하행선 여산 휴게소, 기타를 짊어진 착한 사람들의 어깨에 어둠이 내려앉는다. 가을바람이 제법 쌀쌀하지만, 이들이 엮어내는 화음으로 사위는 금새 훈훈한 온기로 가득하다. 토요일 오후, 고속도로 휴게소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가던 길 재촉하던 사람들이 눈길 주다, 모금함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들의 전략은 주효했다. 착한 심성에 머리까지 잘 썼으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했음은 틀림없는 명언이다. 지난해 9월 자선 노래모임 '아름다운 세상'(회장 신민호)이 아픈 아이들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매달 첫째·셋째주 토요일 오후 시간을 온전히 고통받는 백혈병·소아암 환자들에게 내어주었다. 신민호(31·순창농협)·심태호(39·제약회사)·이재연(40·경찰)·홍상표(34·중소기업)·김성원(29·기아특수강)·송재규(29·순창농협)씨. 장가를 가거나 혹은 안가거나, 아무튼 이 시커먼 남자들이 병마로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힘이 되어주겠노라 나섰다. 생각은 있어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착한 삶' 아니던가. "늘 마음에 품어온 일이었습니다. 다만 실천할 용기가 없었을 뿐이죠. 내가 잘 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을 겁니다." 회장 민호씨의 이야기. 먼저 같은 직장 후배 재규씨를 꼬드겨(?) 중원을 구축했다. 그 뒤로 그룹사운드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던 재연씨가 합류했고, 재연씨의 소개로 노래 잘 하는 심태호, 홍상표, 김성원씨가 흔쾌히 뜻을 함께 해 주었다. 처음엔 전주 객사에서 시작했다. 하지만 뜻이 좋다고 해서 세상 인심이 마냥 넉넉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8개월 가량을 객사와 전주 시내 모처를 전전하다 '민원'이 거세 결국 짐을 챙길 수밖에 없었다.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이나 학원 운영자들에게는 이들의 노랫소리가 소음 아닌 소음이 되었던 까닭. 그리고 나서 묘안을 짜낸 것이 고속도로 휴게소였다. 관계자들을 만나 장소 협조를 부탁했지만, 번번히 거절당했다. 그렇게 몇 번의 좌절 끝에 여산 휴게소를 만났다. 회장 민호씨가 여산 휴게소 관계자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달란다. 그것도 여러 번. 그도 그럴 것이 전주에서는 저녁 내내 노래를 해도 모금액이 고작 4~5만원이었는데, 여산휴게소에 자리를 잡으면서 하루 평균 40~50만원으로 열배 이상 늘었다. 아니, 돈도 돈이지만 아마 '아름다운 세상'의 뜻을 넉넉히 받아준 그 마음이 더 고마웠기 때문일 것이다. 엠프와 마이크를 설치하고, 큰 화분 양쪽에 현수막을 걸어 얼기설기 무대가 만들어진다. 얼기설기하지만, 이 무대는 세상 사람들과 고통받는 아이들을 이어주는 아름다운 다리다. 소박한 무대 앞에 모금함이 놓여진다. '해바라기'의 '사랑으로'가 잔잔하게 울리는 동안, 조금씩 모금함이 채워진다. 노래하는 남자들이 아름답다. "겨울엔 손이 꽁꽁 얼어붙어요. 하지만 아직 지치지 않았습니다. 지치지 않고 계속하는 게 우리들의 꿈이예요. 아픈 아이들을 전혀 모르고 살다가 나와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고통받고 아파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걸 새삼 알게 됐죠. 그런 아이들을 생각하면 약한 마음 먹을 겨를이 없어요. 다들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무대 밖에 서 있는 총무 재규씨. 회원 가운데 유일하게 노래를 못하는, 아니 안하는 그는 '아름다운 세상'의 든든한 살림꾼이다. 한사코 사진 찍기를 거부하지만, 무대 앞에서 담배를 피워물고는 등치에 안 맞게 해사한 웃음을 웃고 있는 사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된다"고, "욕심을 덜 부리며 살게 된다"고 진실한 말을 건넬 줄 아는 그이다. 회원들 모두 개인적인 삶의 의미와 자세가 새로워지는 소중한 계기를 얻고, 나누고 돕는 삶에서 보람을 느끼지만, 세상사 빛이 있으면 언제나 어둠이 있게 마련. 모금액에 의심을 품는 불경한(?) 사람들도 없지 않다. "돈 걷어다가 딴 데 쓰지나 않나 오해를 하는 분들도 있죠. 하지만 게의치 않아요. 저희 홈페이지(www.beautyworld.co.kr)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투명하게 다 공개합니다. 그보다 우리가 이 일을 하면서 생각지 않은 어려움에 부닥친 문제가 하나 있어요. 모금하는 일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대상자를 선정하는 게 더 어려운 문제더군요. 누가 더 아프고 어려운 처지인가를 신중하게 판단하고 도움을 줘야 하니까요. 저희는 병원 사회사업과를 통해 지원을 하거나, 신문·방송에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실리잖아요, 그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어요." 아직 환자나 환자 가족을 만난 일은 없다. 물론 '조직의 결정'이었다. "굳이 만나서 생색낼 필요가 있겠느냐"는 생각에서다. 지면이나 전파를 타는 일도 탐탁치 않아 여러 번 고사한 경험도 있다. 그러다 "회원들이 더 열심히 하고 투명해질 수 있다면... 또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쪽으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유난스레 깔끔을 찾는 것이 밉살맞을 정도다. 하지만 세상 밖으로 품을 내밀고 그 뜻을 열어가자면, 어찌 조심스런 고민들이 실리지 않을 것인가. '아름다운 세상'은 음악에 대한 욕심도 적지 않다. 까페 라이브 가수로 활동했거나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프로들이 많다. 올 크리스마스에는 병원 내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도 계획중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음악적 성숙에 욕심을 내는 건 당연한 일일 터이다. "회원들이 모두 직장이 있다 보니까 다 함께 모이기가 참 어려워요. 노래는 그냥 즉석에서 맞춰보는 거예요. 연습할 여유를 내기 어렵고 연습 장소도 마땅치 않거든요. 다들 음악을 좋아하지만, 좀 더 질 높은 음악을 들려주지 못해 안타깝죠." 그러나 이들의 노래를 들어보면 안다. 노래란 무릇, 그 선한 마음만으로도 훌륭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을. "아름다운 세상요? 회원들끼리 공모해서 결정한 이름이예요. 모금이나 기부문화가 널리 퍼진다면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나누는 삶을 만들어 가자는 의미에서 다들 흔쾌히 통과시켰습니다. 내가 일해 번 돈은 100% 나만의 소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웃에게 고통받는 사람에게 환원할 줄 아는 마음이 필요하죠. 그러면 살아가는데 뭐가 중요한 것인지 조금씩 알게 되거든요. 어두운 삶에서 뭔가 깨어나고 있는 기분, 이 일을 하면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입니다." 길 위에 선 아름다운 남자들, 자기 삶의 확장을 버리고 나누는 것으로부터 시작한 사람들. 그 선한 마음의 파장이 그들 노래처럼 아름답게 퍼져나가길 바란다. 여산 휴게소에 그들의 노래를 남겨놓고 오자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다. "오래도록 이 일을 하는 게 가장 큰 소망"이라던 착한 사람들, 겨울도 가까워지는데 혹여 그들을 만나게 되면, 따뜻한 손난로라도 건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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