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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1 | [문화시평]
나직한 울림,깊어지는 여유
황춘임 전주 동화읽는어른모임(2005-01-06 10:24:39)
요즈막엔 음악회나 공연에 혼자 가는 일이 많아졌다. 고등학생이 된 큰 아들은 새벽에 학교에 가서 자정이 다 되어야 집에 돌아오니 문화 생활과는 당분간 이별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이고, 6학년짜리 작은 아들조차 숙제가 많다, 피곤하다는 따위의 이유를 들어 문화 나들이에 동행을 거부하는 일이 잦아졌다. 맥이 빠져 마지못해 박물관을 향해 가는데 차는 왜 그리 더디 가는지. 그러고 보니 월드컵 경기장에서는 ‘전국체전 개막식’이 한창 무르익었겠다. 화려한 마스게임, 불꽃놀이, 인기 가수. 내가 아는 사람들은 ‘뜨락 음악회’와 ‘전국체전 개막식’을 두고 고민하다가 대개는 ‘체전’ 쪽을 선택해서 가버렸다. ‘체전 개막식’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음악회를 하는 문화저널이 원망스러웠다. ‘체전’에 간 사람들도 그렇게 한마디씩들 하고 갔다. 왜 하필이면 같은날 이냐고. 박물관 뜨락에 들어섰다. 조명을 받아 빨갛게, 파랗게, 보랏빛으로 빛나는 나무들을 보자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나는 ‘나팔꽃’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사회자가 ‘어리버리한 시인 다섯 명과 똘똘한 가수 아홉 명이 모여 만든 시노래 모임, ’나팔꽃‘을 소개합니다’라고 할 때까지는. 포스터에서 백창우와 김용택 이름만 본 것 같은데, 나중에 보니 ‘나팔꽃과 함께하는 뜨락 음악회’ 라고 분명하게 써 있었다. ‘나팔꽃’은 1999년 봄, 시인 김용택, 정호승, 도종환, 안도현, 유종화와 음악인 백창우 김원중, 배경희, 김현성, 홍순관, 류형선, 이지상, 안치환, 이수진 등이 모여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거대하고 화려하며 빠른 세상에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선 이들이 ‘작고, 낮게, 느리게’를 노래하고 싶어서 만든 모임이라고 한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이다. 그래서 ‘화려하고 거대한’ 세상에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체전 개막식’ 쪽으로 마음이 갔던가보다. 시와 노래의 만남, ‘나팔꽃’이 시에 붙인 노래를 몇 곡 불렀다. ‘오늘은 참 좋다’ ‘제비꽃 편지’ 등. 처음 듣는 노래인데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아는 시도 아는 노래도 아니었는데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웅얼거리니까 그냥 노래가 되었다. 시들 때는 시들 줄 알아야 꽃인 것이지요. 그래서 좋다 시들어라, 하고 음~ 그대로 두었지요. 안도현의 시집 『그리운 여우』에 나오는 ‘제비꽃 편지’의 끄트머리이다. 왕나팔 김용택 시인은‘잘 만난 시노래 때문에 시가 시집 밖으로 걸어 나오고 노래가 좀 더 깊어질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시와 노래가 내 마음을 촉촉히 적시고, 천천히 나를 돌아보는 모처럼의 여유를 갖게 한다. 더군다나 지금은 자식도, 아는 이도 없이 혼자 아닌가. 무대를 장식한 갈대, 나직나직한 노래, 둥두렷이 뜬 보름달, 하모니카 소리, 날씨는 쌀쌀하지만 가슴속은 따뜻한 기운으로 충만해지는 느낌이다. 그 느낌을 무대에 전달하고 싶고,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마땅한 방법을 못 찾았다. 무대 가까운 곳에 앉았더라면, 원군 한 사람만 있었더라면, 무언가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으면 ‘좋다’라고 소리쳐 보고 싶었다. 그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지나치게 점잖은 관객들 속에서 더욱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다행히 열성 팬으로 보이는 사람이 쉴 새 없이 환호해 주어 썰렁한 분위기는 겨우 면했다. 끝나고 아는 사람을 만나서 물어 보았더니, 우리 40대가 아는 노래가 많이 나와서 좋았다고 한다. 사실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기는 그나 나나 마찬가지 일 텐데. 분위기가 30, 40대 취향인 덕분이겠지. 김용택 시인이 제자들의 시를 세 편 낭송했다. 단 세 줄에 쥐의 일생을 담은 초등학생의 솜씨에 감탄하여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시를 외우고 있다. 쥐 쥐란 놈은 참 나쁜 놈이다. 먹을 것을 살짝살짝 훔쳐간다. 그러다가 쥐약 먹고 죽는다. 김용택 시인의 제자가 되면 초등학생도 시인이 된다. 시골 분교의 그의 학생들은 늘 보아서 지루하기만한 그저 그런 산과 들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한다. 드디어 백창우가 나왔다. 그를 음악인이라 불렀다. 작사가, 작곡가, 시인, 음악 프로듀서, 그가 하는 일이 원체 많으니 종합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이리라. 사실 내가 ‘뜨락 음악회’에 간 것은 90%는 백창우 때문이다. 우리 ‘동화읽는어른 모임’ 회원들이 즐겨 부르는 노래가 모두 ‘백창우의 노래 창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원수 시에 붙인 노래’ 와 ‘전래동요’를 몇 년 동안 불러 오다가 요즘은 ‘어린이 시에 붙인 노래’를 부르고 있다. 프로그램에는 ‘함께 부르는 노래 - 동요 부르기’ 라고 되어 있었다. ‘내 똥꼬’, ‘내 자지’, ‘싫단 말이야’, ‘겨울 물오리’를 불렀다. 사람들이 즐거워하면서도 의심스러워했다. 그런 노래 불러도 정말 괜찮은지. 그 노래들은 동화읽는어른과 그 자녀들은 모두 아는 노래이지만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는 노래이다. 이왕 함께 부르려면 악보를 미리 준비해서 나누어 주었더라면 좋았겠다. 백창우의 어린이 노래는 요즘 어린이의 삶이 녹아 있고, 어린이가 중심인 노래라서 아이들이 무척 좋아한다. 어느 집 아이는 돌아가서 엄마가 멀미가 날 정도로 ‘내 똥꼬’와 ‘내 자지’를 부르고 또 불렀다고 한다. 나팔꽃 동인은 아니지만 박남준 시인도 초대 손님으로 나와 시낭송을 했다. 시인이 직접 들려주는 시는 더욱 가슴이 뭉클했다. 내가 잘 아는 어머니 독서회 회원 몇이서 박남준 시인 만나러 모악산에 갔더니 빈 집에 감만 떨어져 뒹글고 있더라,고 했는데 뜻밖에 음악회에서 만나니 반가웠다. 지리산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음악회가 끝나고 뒤풀이 한다고 음식 차려 놓은 곳에 가서야 아는 사람 세 명 만났다. 내가 적극 권유해서 온 사람들이라 반응이 궁금했다.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만족해했다. 구체적으로 대답하라고 했더니, 분위기가 가을 정취가 물씬 풍겨 마음에 들었다, 노래가 잔잔해서 좋다, 사회자 목소리가 멋있다, 시낭송이 좋다, 재미있는 어린이 시다, 신선한 동요이다, 김용택 시인 직접 보니 좋다, 백창우 만나서 흐믓하다, 야단스럽지 않아 좋다, 아이들이 떠들어도 눈치 안 보여 좋다, 보름달이 운치를 더 해 주었다, 함께 달을 보는 시간을 가지니 좋다, 한 집 남편은 ‘흔치않은 귀한 공연인데 무료로 보여주고 거기다가 먹을 것까지 주니 더 좋다. 특히 이렇게 맛있는 막걸리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본다. 이런 좋은 정보를 당신은 어떻게 알았나?’ 하며 존경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더란다. 깊어가는 가을에 내 삶에 의미 하나를 더한 느낌이 들어 공연장에 들어 갈 때와는 달리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꿈꾸는 사람만이 세상을 통째로 가질 수 있지’를 흥얼거리며 이 갈대를 꽂을 곳은 정녕 빈 커피 병뿐인가? 하고 보름달을 보고 묻는다. 황춘임 | 1959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사람들과 문화정보를 나누고 참여를 권유하는 것이 취미일 정도로 문화 애호가이며, 문화저널 애독자로서 주위 사람들에게 책을 권하는 것도 열성적이다. 피아노교습소를 운영하고 있으며, 동화읽는 어른모임에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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