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 [수요포럼]
전통적 가족관계에 도전장을 내밀다
김회경 기자(2005-01-05 15:45:35)
마당 수요포럼 여덟 번째 순서 '영화 텍스트로 읽는 가족이야기'가 9월 17일 전주정보영상진흥원에서 진행됐다. 이날 포럼은 도발적인 소재와 거침없는 표현으로 개봉과 함께 화제를 몰고 온 영화 <바람난 가족>을 통해 이 시대 가족문화와 성 담론을 살핀 자리. 몇 년 전까지만 해도 TV 안방극장 등 공공 매체에서 철저한 금기로 다뤄졌던 불륜과 외도가 최근 들어 드라마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영화에서도 오래된 가족(또는 부부)관념을 파괴하며 파격적인 가족관계를 등장시켜 변화된 가족문화를 그리고 있다.
<바람난 가족>은 이같은 흐름 속에서 가족과 부부, 삶의 본질이 과연 무엇인지를 관객들에게 다시 질문하며 위선적인 윤리관이나 숨겨둔 욕망들을 헤집어 놓은 문제작.
이날 포럼에서는 이 시대 가족과 부부의 의미가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지 새롭게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또 영화 주인공들의 사고와 행동에 '감성적 동조'는 있어도 '현실적 동참'은 어렵지 않겠느냐는 참석자들의 지적이 공통적이었다. 감성적으로는 주인공들의 삶에 연민과 공감을 느끼지만, 실제 본인의 삶과 현실에 적용하기엔 파격적이었다는 평. 그러나 변화된 가족관과 부부 사이의 위상, 특히 여성의 지위 변화를 통쾌하게 그리고 있어 시원하고 신선했다는 견해들이 주를 이뤘다.
국선희 전북대 여대생커리어개발센터 전임연구원이 발제를, 문화평론가 문윤걸씨가 사회를 맡았다. 참석자들이 적어 아쉬움을 남겼으나 포럼 현장은 어느 때보다 뜨겁고 활기찼다.
이날 포럼 내용을 정리해 싣는다.
영화, 어떻게 보았나
국선희씨는 발제에서 "사회는 빠르게 변화해가는데, 가족의 전통적 기능은 여전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전제하고 "가족 형태는 변하지만, 가족이 수행하는 역할이나 기능은 과거 사회나 현대나 차이가 없어보인다. 이런 가족의 모습이 현대를 사는 우리와 어떤 연관이 있을지 <바람난 가족>이 급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바람난 가족>이 우리 시대 가족의 전통적 관계나 역할에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하면서 주인공들의 행동을 급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해석.
이날 참석자들의 영화 평은 제각기 다른 각도로 펼쳐졌다. 영화 속에 형성돼 있는 다양한 텍스트 가운데 무엇을 비중 있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드러낸 부분. 특히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호정과 시어머니)과 상대 배우자 사이의 갈등 해소방식이 파격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재규 시민행동 21대표는 "상당히 쿨하다는 느낌이었다. 질척대지 않고 산뜻하게 관계를 풀어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기존의 관계를 고집하거나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런 느낌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섹스는 꼭 부부사이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이혼은 반드시 해서는 안될 일인지, 반드시 그런 고정관념에 휩싸여 있을 필요가 있는지 되묻게 됐다. 우리 기성세대는 그걸 가족 윤리의 중압감과 섹스에 대한 경계를 생각하며 보아서인지 영화를 무겁게 본 것 같고, 신세대들은 그럴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기성세대보다는 편하게 영화를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새로운 가족관계와 변화된 부부관계가 우리 사회의 달라진 가족문화나 풍속도를 반영하고는 있지만, 파격적이고 극단적인 상황 설정이나 극중 인물들의 캐릭터에 동의할 수 없거나 불편했다는 평도 뒤따랐다.
최인 CBS 기자는 "이 영화를 아내와 함께 봤는데,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해주려고 하는 메시지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면서 "바람난 가족이 아니라 병든 가족 같았다. 가족에 대한 소중함도 없고 용서도 없다. 가족해체라는 메시지가 쿨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며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영화의 페미니즘 요소가 강하거나 여성의 지위 변화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에 관해서도 참석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백옥선 전주공예품전시관 관장은 "이 영화는 여성을 타깃으로 하는 페미니즘 영화를 표방했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호정의 남편 영작은 결국 애인에게도 부인에게도 거절당하는 존재로 끝맺음되는데 여성 페미니즘이 진하게 깔려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극중 상황설정이 지나치게 극단적이거나 관객들에게 과잉감정을 유도하려는 부분은 불만이었다."고 말했다.
박은영 전라일보 기자는 "이미 한국사회가 변화하고 있다는 걸 생략과 압축을 통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변화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가 관심을 끌었는데, 주인공 호정이 고등학생과 관계를 맺는 설정은 매우 파격적이었다. 미성년자와의 관계는 우리 사회에서 근친상간에 버금가는 비난거리다. 그런 파격적인 설정에다 호정이 고교생과의 관계에서 주도적으로 섹스를 이끌어간다. 무조건 참고 견디며 남자의 결정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도 당당히 자기 삶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 여성에 대한 전통적 고정관념에 대한 파격적인 도전이라는 메시지가 신선했다. 가족과 여성, 앞으로의 변화를 예고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며 여성의 선택과 지위에 대한 파격적인 묘사가 변화하고 있는 시류를 예리하게 담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등장인물과 상황설정이 전통적 가족관이나 부부관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어 신선한 충격이었다는 평이 대부분이었지만, 정작 주인공들의 내면심리를 파고 들어가면 전통적인 가족관념을 크게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런 평가를 통해 영화가 페미니즘 영화인가에 대한 논의도 이어졌다.
도휘정 전북일보 기자는 "등장인물들이 노골적으로 바람을 피운다거나 고등학생과의 섹스 등이 충격적으로 다가오지만 주인공들이 그런 자신의 선택을 통해 큰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호정이 매우 쿨하게 그려지고 있지만, 결국은 승리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도 패미니즘 영화는 아닌 것 같다. 겉으로는 매우 진보적인 것 같지만,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 틀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국선희씨는 "페미니즘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는 아니라고 본다. 다만 성과 가족관계에서 여성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가족이나 부부에 대해 위기나 진보, 해체를 거론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역사 이래로 가족관계는 좋았다거나 나쁘지 않았다. 단지 좋게 보고 나쁘게 보는 데에 이데올로기가 작용하고 있을 뿐이다. 가족은 혈연관계로 맺어져야 하고, 남녀 사이에 층위나 서열이 있어야 하고, 이혼은 절대 금물 등의 가족 이데올로기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오다, 조금씩 그 지배 이데올로기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징후를 영화가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결혼과 바람 사이, 숨겨진 욕망이 분출되는 시대
가족과 남녀 지위에 대한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해가야 할 것이라는 남성 참석자들의 발언도 눈길을 끌었다.
이광철씨는 "전통적인 가족관이 도전받으면서 가족 구성원의 지위, 특히 남녀의 지위에도 평등하고 수평적인 관계가 요구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과정에서 삐걱거릴 수밖에 없고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힘도 없으면서 전통적인 가치관만 유지하려고 하면 남자만 불행해진다. 새로운 관계를 인정하고 찾아가는 것이 남자도 생존할 수 있고 가족도 유지될 수 있다."며 남성의 위기의식(?)을 드러내 참석자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이재규씨도 "여성들 역시 남성 못지않게 욕망을 분출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고 본다. 지금은 문화나 감성의 수위가 이미 달라지고 있고, 남자들 역시 자기 패권이 달라지는 걸 느끼며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갈수록 관계의 변화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기혼 남성과 여성의 외도를 이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고 수용하고 있는 지에 관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재규씨는 "여주인공인 호정이 조금씩 조금씩 장난기를 갖고 고등학생을 만나는 과정이 나오는데, 어찌보면 이런 점이 극단적인 소수의 경우가 아니라, 우리 안에 감춰진 욕망을 다소 급진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면서 "서울은 30~40대의 60~70%가 여자도 일정한 학력과 재력이 있으면 한명씩은 파트너를 갖고 있고 그걸 양성적으로 이야길 한다고 한다. 남자들의 바람은 가족에게만 비밀이고 남자들 사이엔 더 이상 비밀이 아니지 않나. 그런데 이제 여성들 사이에서도 바람피우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남성 못지 않게 여성의 외도 역시 그 비율이 높아지고 상당부분 외부 노출이 진행되고 있다는 진단.
그러나 국선희씨는 "자신의 외도를 드러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남성의 바람기를 양성적 바람기, 여성의 그것을 음성적 바람기라고 이름 붙여 봤는데, 아직까지 양성적인 남성의 바람기나 음성적인 여성의 바람기는 같은 확률이라고 본다"면서 상대적으로 남성의 외도보다 여성의 외도를 우리 사회가 훨씬 더 비도덕적이고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가족관계나 부부관계의 기존 틀이 상당부분 도전 받고 있거나 가족에 대한 가치와 의식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의견을 같이 했다. 영화 <바람난 가족>이 이러한 흐름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어 충격적 혹은 신선했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변화하고 있는 시대적 정서를 무시하고 전통적인 가족관을 고집하거나 전통적 이데올로기를 대입해 가족해체와 위기를 섣불리 논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달라진 가족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바람직한 모델을 제시하면서 가족문화에 대한 이 시대의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주장도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냈다.
| 정리-김회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