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 [세대횡단 문화읽기]
평화를 가꾸는 것 그자체가 진리..절망은 없다
도법스님/양영인 교무(2005-01-05 15:24:53)
절대적인 믿음과 신념. 매 순간 흔들리고 갈등하는 범속한 사람들에게 그것은 삶의 깊은 동경이자 등불이다. 그 절대적인 믿음과 신념, 견고한 진리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깨달음의 근원이 되고 있다.
종교는 우리 사회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고 말한다. 종교가 구가하는 진리와 끊임없는 성찰이야말로 이 사회를 정화시키고 올바르게 인도할 소중한 가치라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전 세계가 혼란과 갈등, 대립으로 첨예하게 뒤엉키고 있는 지금, 종교인의 사회적 역할이 그 어느때보다 귀해졌다. 개인적인 수행과 성찰에만 머물지 않고, 종교를 통해 얻은 깨달음과 지혜를 사회 속으로 전파시켜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러한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종교 간 분쟁과 반목 또한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소다. 그러나 위기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불씨는 있다. 남원 실상사에 있는 도법스님은 종교가 종교로서 바르게 자리잡도록 개개인 스스로가 최선을 다하되,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그 힘을 모아가면 '문명사적 변화'를 가능케 할 것이라고 일갈한다.
우중 산사, 실상사의 뜨락은 평화롭고 고요했다. 이곳에서 주지인 도법스님과 원불교 양영인 교무가 만났다. 생명평화운동가이자 치열하고도 적극적인 현실 참여로 진리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도법스님, 그리고 종교운동가를 꿈꾸며 착실히 역량을 다져가고 있는 젊은 신앙인 양영인 교무가 만났다.
위기의 시기에 종교인의 사회적 책무는 무엇인지, 성찰을 통해 진리로 다가서기 위한 삶의 자세와 지혜를 담은 이야기들이 큰 울림이 되어 안겨진다.
양 : 도법스님 뵙게 돼 무척 반갑습니다. 스님 강좌를 듣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만나뵙게 된 건 처음입니다. 모쪼록 좋은 말씀과 조언 부탁드립니다.
도법 : 잘 오셨습니다. 좋은 차 마시면서 좋은 이야기 해봅시다.
양 : 예. 태풍이 지나가고 얼마 전 후배한테 연락이 왔는데, 이야길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기가 나가고 가스가 나가 먹을 것을 못해 먹는 것 때문에 당황한 게 아니라 인터넷이며 TV를 보지 못해서 당혹스러웠다고 하더군요. 그 이야길 들으면서 우리가 물질에 끌려다니며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삶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저를 비롯해 요즘 젊은이들이 그게 가능할 지 모르겠습니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신다'…진리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
도법 :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고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로 접근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우리가 지금까지 말하고 진행해 온 일들 중에 온전히 성공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여태 변화와 발전, 개혁과 진보, 개발과 성장에 희망을 걸고 달려온 게 아닙니까. 그러면 좋은 세상이 될 거다, 행복해 질거다 하면서 말이죠. 물론 개발과 성장, 개혁과 진보, 변화와 발전은 노력한 만큼 진행됐다고 볼 수 있어요. 경제성장도 이루고 과학기술의 고도화도 이뤄졌으니까요. 그런데 그것이 성공했다면 평화로운 세상, 살기좋은 세상이 됐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보세요, 전혀 아니라는 거예요. 다시 또 우리가 뭔가를 이야기하고 모색해야 할 시기라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성공한다든지 이뤄진다는 것도 환상에 불과합니다.
양 : 그렇다면, 무언가를 진심으로 대하고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자세가 필요할까요.
도법 :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람들이 성자요 현자들인데, 나는 간디에 관심이 있어서 그분의 말씀과 삶의 자세를 통해 많이 배웁니다. 나는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이뤄질지 안 이뤄질 지에는 관심이 없어요. 다만 그것이 진리의 길인가를 생각합니다. 진리요, 필요한 길이요, 바람직한 길인가는 성패와 관계없이 지금 이곳에서 이뤄져야 하는 겁니다. 새로운 세계관이나 가치를 세우고 의식을 바꿔내는 일, 이는 가능 불가능의 문제가 아니고, 선택의 여지도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인간다워지려면, 철학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평화로운 삶,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려면 세계관과 철학을 바로 세우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이 길을 가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에요. 이 길만이 삶의 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게 바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겁니다. 우리 삶을 반성하고 성찰하고 올바른 가치의식을 가꿔내는 건 필수적으로 해야 할 절대적 당위다, 라는 것이죠.
양 : 말씀하신대로 개발논리로 점철된 우리의 역사는 반성하고 성찰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정의와 인권운동에 투신한 간디나 틱 낫한 스님 등은 종교 사상과 종교운동을 통해 그런 가치를 일궈냈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 그런 쪽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데요. 새로운 대안운동으로 종교운동이 갖는 의미와 가치들이 일반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어요.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종교를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이라고 여기는데, 종교운동이 생명이나 평화운동으로 보다 폭넓게 확대되고 사회적으로 의미와 힘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또 생명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서로 소통하는 방식을 몰라 많이 부치고 떠나고 있습니다. 종교운동과 그 내용이 중요하다는 걸 아는데, 대안운동으로서의 방식이나 단계를 어떻게 밟아야 할 지 고민이 됩니다.
도법 : 종교인이 각자의 종교를 바로 하면 되는 겁니다. 종교간에 벽을 허물고 대화하자, 그런 이야길 많이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만남과 교류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이보다 우선하는 게 있어요. 만남, 대화, 교류는 종교인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보다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고 봐요. 근원적인 가르침, 참된 가르침, 위대한 가르침, 영원성과 보편성을 가진 가르침, 진리의 가르침이 바로 종교인데, 진리는 보편성과 영원성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마를 땐 물을 마신다, 이것이 바로 보편적이고 영원한 진리인 거예요. 이라크인도 부시도 물을 마실테고., 불교인이나 기독교인, 남녀노소, 빈한자, 부유한자도 물을 마십니다. 진리에는 벽이 없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요. 종교란 바로 진리의 가르침이고, 그러려면 벽이 없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역사는 어땠습니까. 불교, 기독교가 울타리를 쌓아놓고 살지 않았습니까. 하느님 이름으로 울타리를 쌓고, 부처의 이름으로 울타리를 쌓으면 그건 종교인이라고 해도 부처를 모르는 거고 하느님을 모르는 겁니다. 자신의 종교,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무지요 왜곡된 신앙을 하기 때문에 벽이 나타나는 거예요. 종교인들이 이를 바로잡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한국사회를 바로 보면 사실 종교는 없습니다. (웃음) 온통 벽이고 울타리 아닌가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종교의 간판을 내걸고 온통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돼 있어요. 종교라는 간판을 내세워 집단 이기를 확대, 강화하는 활동뿐입니다. 이렇게 보면 한국사회는 종교가 없었다는 겁니다. 종교라는 개념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인식하고, 그 의미를 내 종교와 신앙생활 속에 적용하는 것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타 신앙인과 벽이 생긴다면, 내가 다른 신앙을 잘 모르는구나, 내 신앙을 모르는구나 느껴야 해요. 그 기본과 근본이 갖춰져야 진정한 만남과 교류가 가능합니다. 그게 아니라 그저 만남, 교류만 강조하는 건 정치적 제스처일 뿐인거죠. 내 종교, 타 종교 사이의 벽도 없어야 하지만, 종교와 세속과의 벽도 없어져야 해요. 진리의 세계는 어떤 벽도 없어야 한다는 게 바로 종교의 진리입니다. 일상 속에서 과감히 허물고 넘어서면서 종교생활을 해야 합니다.
제2의 화살, 재생산하지 말아야 한다
양 : 이 자리가 종교의 사회적 책무를 이야기하는 자리지만, 우선은 제 자신의 참회와 반성부터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임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인데요. 종교인의 옷을 입고 종교생활을 하지만, 오히려 반생명 반평화적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이 눈에 많이 띕니다. 성자의 가르침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그 가르침을 현실로 적용하지 못하는 것은 제도와 구조의 문제가 크다고 생각해요. 비본질적인 문제 때문에 본질에 들어가지 못하는 한계를 보면서 무척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저 역시도 본질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걸 넘어서지 못하고 있어 고민이 많습니다. 원불교는 형식적으로 많이 열려있고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하는 것처럼 인식돼 있지만, 말씀하신대로 집단이기주의가 있지는 않았나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종교인간의 만남의 장을 꿈꾸고 있지만, 조직과 제도를 뛰어넘어 그것을 실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종교가 보수적인 부분이 많이 있구요. 종교 안에 있는 우리인데도 말이죠.
도법 : 종교 안에 있든 밖에 있든 오십보 백보 아닌가요? (웃음). 부처는 당신의 눈앞에서 국가와 민족이 처참히 살육당하고, 당신의 제자로 인해 세 번이나 살해음모를 당합니다. 생모의 얼굴도 모른 채 죽게 되고 말이죠. 한마디로 인간에게 주어진 온갖 비극적 상황이 점철된 삶이었죠. 현실은 자기의 뜻과는 달리 갑니다. 아무리 자신이 성자라 해도 현실의 문제는 안게 되어 있다는 거죠. 종교인이든 아니든 그런 현실적 문제를 안게 되는 건 마찬가집니다. 간디도 식민지라는 첨예한 이해갈등 속에서 고통과 상처, 절망을 겪게 되는데요. 부처나 간디나 우리처럼 범속한 사람들이나 모두 조직적 한계와 문제점들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 현자들과 우리의 차이는 어디에 있을까요. 갈등과 고통의 문제는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같을 수밖에 없는데, 부처는 제2의 화살을 맞지 않아야 한다고 이야길 합니다. 누구나 다 첫 번째 화살은 맞는 거예요. 성자도 범부도 마찬가지죠. 그러나 범인은 계속 화살 맞기를 재생산하지만, 성자들은 두 번째 세 번째로 재생산되지 않게 한다는 겁니다. 첨예하고 구질구질하고 비극적인 현실은 성자나 중생이나 마찬가지란 말이죠. 예를 들어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게 모두가 맞아야 할 첫 번째 화살이라고 합시다. 부처는 그저 아름답다라는 것에 그치고, 중생은 저걸 캐다가 우리집 마당에 심어야겠다 생각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하면, 이 사람 저 사람도 다 그러고 싶어지고 그 과정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건 탐욕의 문제죠. 또 분노 역시 저 사람이 욕을 하면 나도 욕하고 주먹을 내지르는 게 바로 제2의 화살을 확대해가는 것이죠. 그러나 부처는 인내나 관용을 통해 욕이 와도 욕으로 대응하지 않았단 말이죠. 이해와 설득, 비폭력으로 응대했어요. 이 차이에요. 우리가 몸담은 종교계가 종교 본연의 뜻과는 관계없이 조직논리나 이해에 따라 짓밟히고 방치되고 왜곡되고 있는 게 사실이에요. 집단논리는 종교 본연의 뜻이 세속화되고 자기모순에 빠지고, 혼란과 악순환을 거듭하게 한다는 사실, 그걸 정확히 읽어내는 게 우선 필요해요. 물론 그 과정에서 상처받고 절망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종교 본연의 뜻을 집단 속에서도 최대한 손상되지 않게 하고 실현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 그 길밖에는 없어요. 가급적 그렇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일, 말하자면 힘을 모아 운동성을 갖는 작업을 해야겠죠. 그러나 문제 해결은 치열하게 다루되, 제2의 화살이 돌아오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제를 정확히 봐야 해요. 내가 소속된 집단이 내 본질과 얼마나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얼마나 조직 논리로 좌지우지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꿰뚫어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양 : 출가자에게 가장 귀중한 게 서원이라고 보는데요. 세상이나 자신을 바라보는 눈을 날카롭게 터득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까지 스님께도 어떤 계기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 첫 출발점이 무엇이었는지, 개인적인 문제부터였는지, 사회적 계기가 작용해서인지 궁금합니다. 개인적 경험과 과정을 듣고 싶어요.
도법 : 나는 지금 평화로운 사람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요. (모두 웃음) 개인적으로는 존재 이유에 대한 근원적 고뇌에서부터 시작했어요. 열여덟 열아홉 무렵, 끝없는 허무에 눈뜨면서 존재 이유에 대한 근원적 회의에 빠지게 된거죠. 그걸 붙잡고 지금까지 살아온 거예요. 존재 이유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는 한 우리의 모든 자유와 성공, 사랑, 아름다움은 다 허무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존재 이유에 대한 해답을 얻어내고 가치를 얻어내고 그걸 갖고 삶의 문제 다루지 않으면 그 이외의 것은 다 허무하다는 걸 절실히 느낀거죠. 그러니 내 문제가 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걸 풀지 못하면 모든 삶은 허무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걸 밝혀내자는 데서부터 문제의식이 시작됐고, 그래서 불교공부도 하고, 참선도 하고, 기도도 한거죠. 한 15년 가까이 그런 고민을 안고서 방황도 하고 갈등도 하고 모색도 하고 그랬는데, 15년 정도 공부하다보니 불교에 대한 이해와 인식이 좀 더 분명해지고 심화되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불교를 제대로 공부하면 이런 부분을 풀어낼 수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인생의 원초적 고뇌를 풀어내는 나름의 방향성과 해답에 대한 신념을 갖게 된거죠. 그 전엔 내 고민이 너무 커서 사회 문제는 일체 관심이 가지 않았어요. 내 고뇌가 너무 절박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15년을 그렇게 불교 공부를 하면서 신뢰를 갖게 되니까 여유가 생기고 내가 몸담고 있는 교단을 보게 되었죠. 너무 엉망인 거예요. 이걸 방관할 수 없겠다 싶어서 나름대로 그걸 풀 방법도 모색하고, 그러다 보니 내 개인과 교단의 문제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걸 인식하게 됐죠. 그것이 사회문제나 사회의 아픔도 내 아픔, 내 문제라는 쪽으로 확대된 겁니다. 불교는 연기론적 세계관이에요. 처음부터 너 따로 나 따로, 개인과 사회문제가 남남이 아니라는 거죠. 밖이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옷을 입듯이 안과 밖, 나와 사회가 분리될 수 없다는 겁니다. 사회와 이웃의 아픔이 내 문제고 내 아픔이에요. 불교가 내면적, 은둔적, 심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불교 수행론을 잘 못 알고 있는 겁니다. 안이든 밖이든 어느땐 자기 자신 속에서, 또 어느땐 관계 속에서 상황에 따라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 것이지, 개인적이고 내면적으로만 문제를 풀어가는 건 아니에요. 진실되고 헌신적이고 성실하게 문제를 다루게 되면, 내 내면에서 문제를 풀 때도 내면의 변화가 세상에 감동과 감화로 전해지는 것이고,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풀게 되면 상대에 대한 헌신과 성실함이 내 내면으로 승화되는 것이기 때문에 안으로 하든 밖으로 하든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거예요.
미국이 말하는 '평화'엔 이라크가 없었다
양 : 말씀을 들으면서 기도와 신앙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는 진실을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이란 말씀에 공감을 하게 되는데요. 그동안 스님께서는 생명평화 민족화해를 걸고 천일기도를 진행하고 계신데, 기도를 통해 힘을 얻게 되고 감동도 있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기도 중에 얻으신 게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도법 : 그런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모두 웃음) 기도를 통해서 이뤄지는 결과나 공득은 뭘까, 자꾸 그 이야길 많이 하고 사람들도 관심을 갖는데, 불교 철학으로 보면 기도를 통해 뭔가를 얻는 건 아닙니다. 온전히 존재하는 것, 따로 특별히 우리가 구하고 얻어내야 할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그것은 또 다른 탐욕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만 탐하는 게 욕망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신적으로 뭔가를 탐하는 것도 똑같은 욕망입니다. 그냥 온전히 존재하는 행위, 지금 여기 온전히 존재하는 것,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 그 행위 자체가 결과요 공덕일뿐입니다. 그 이외에 이뤄져야 할 뭔가가 따로 있어야 할거라고 생각해서는 안돼요. 이런 불교의 논리가 내게는 큰 위로에요. (웃음) 3년의 시간동안 지금 여기 온전히 존재하기 위해 내 힘을 다해 기도하는 것, 그 자체가 기도의 공덕이고 결과입니다. 다만 기도를 진행하면서 사물을 보는 눈이 좀 더 분명해졌다거나 섬세해졌다거나, 또 따뜻해졌다거나 하는 그런 변화가 있을 것 같아요. 싱겁겠지만 이게 솔직한 대답이에요.
양 : 예. 저도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가장 큰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얼마 전 논문을 정리하느라 시민운동가들의 의식조사를 한 적 있는데요. 그러면서 느낀점이 있었습니다. 신앙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자기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는 단계인 것 같았어요. 기도가 밥 먹고 잠자고 하는 것처럼 자기 삶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길 많이 하는데요. 그것이 늘 깨어 있는 삶에선 가능한데, 그것 역시 어느 시점에선 또 일상화되고 매몰되기 쉽다는 함정이 있는 것 같아요. 일반인이 기도를 통해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도록 구체적 신앙의 과정, 방법,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방법, 그런 쪽으로 좋은 말씀 들려주세요.
도법 : 가치의 창출은 쉬운 길, 편한 길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좀더 편한 길, 부드러운 길만 찾는단 말이죠. 삶의 문제가 꼭 어려운 문제만은 아닌데, 우리를 감싸고 있는 흐름과 문화가 워낙 잘못된 쪽으로 구조화되고 길들여져버리니까 진리의 정신에 맞게 삶의 문제를 다루는 게 너무 아득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게 되는 거예요. 성인들 말씀을 보면, 세상에는 반드시 이뤄지는 길과 죽을힘을 다해도 이뤄지지 않는 길이 있다고 했습니다. 반드시 이뤄지는 길은 진리에 맞게 노력하면 반드시 이뤄진다는 거죠. 그렇지 않고 명예와 이익, 개인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길이라면 아무리 노력하고 업적을 이뤄낸다 해도 인간을 행복하게 하거나 평화롭게 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 길만 가고 있어요. 더 갖자, 앞서가자, 싸워 이기자, 우리가 죽어라 하는 게 바로 이거 아닌가요. 거기에 바치는 관심과 열정을 다른 쪽에 절반만 쏟아도 성공할 거란 말이죠. (웃음) 그렇게 어려운 길은 죽어라 가면서 왜 더 쉬운 길은 안 가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가진 삶의 방식, 익숙한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과 깨어남이 필요해요.
요즘 시민사회운동도 큰 것만 하다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쪽으로 몰려 운동을 하고, 사람들도 육체나 물질이 좋다고 마구 쫓아가다가 이제는 정신이나 영생에 관심이 쏠리는데 그 또한 진실의 왜곡이고, 대안이 아니라는 거예요. 큰 것, 물질적인 것만 쫓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낫기야 하지만, 제대로 된 길은 아니라는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필요해요.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반성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봐요. 성찰을 통해서만이 진실에 다가설 수 있고, 그 진실을 바탕으로 해서 삶의 문제를 다뤄야 풀어갈 수 있어요. 반성적 삶을 살다보면 삶의 많은 거품을 거둬내게 될 거라고 봅니다. 우리가 얼마나 허황된 꿈과 환상에 속고 휘말려 있는지 보이게 되고 그걸 거둬내면 되는 겁니다.
9.11테러를 한번 볼까요. 부시가 상식적으로 따져보고 진지하게 문제를 직시했다면, 테러 직후 뭘 해야 했을까요. 당연히 왜 테러가 발생했을까 그 원인을 찾는 게 상식 아니겠어요? 원인 규명을 제대로 했다면 미국이 전쟁으로 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자국의 대외정책을 검토하면 문제 근절의 길이 보였을텐데, 그걸 무시하고 기분대로 가버린 거 아니냔 말이죠. 자기 기질대로 자기 성경대로 가서 쳐부셔버렸잖아요. 이건 몰상식의 극치에요.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핵심을 짚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언제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은 적 있나요. 그런데 왜 안될까요. 이유는 진리에 맞게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았단 말이죠. 그건 또 영원성과 보편성에 맞게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예요. 우리는 진리의 정신에 근거해서 평화를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온통 패거리 논리뿐이었어요. 이라크는 미국인이 말하는 '평화'에 들어있지 않았고, 미국인 자신들이 생각하고 필요한 평화일뿐이었단 말이죠. 우리가 고루 공감하고 보편적으로 느끼고 영원히 가져야 할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말한 공존 평화 자유가 온통 진리의 정신과는 무관하게 패거리 논리만으로 사용돼 온 겁니다. 21세기는 이제 이 길을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너무 헤매왔어요. 그 길을 가려면 성찰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거죠. 그것만 열리면 그 다음은 단순 소박한 길이에요.
순간순간 평화를 가꾸는 것, 그것이 곧 평화
양 : 스님께서는 사회적, 역사적 성찰까지 거론을 하셨는데 실제로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건 개인적 성찰의 정도뿐입니다. 광폭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건이나 터져야 그때 겨우 멈추는 정도인데요. 새만금 문제나 부안 핵폐기장, 이경해씨 자살, 정몽헌씨 자살 등 이렇게 큰 사건이 터질 때에만 우리가 잘 못되어 가고 있구나, 하는 걸 겨우 느끼는 것 같아요. 조용히 말할 땐 귀 기울이지 않고 극단적인 행동을 해야 겨우 귀기울이는 상황, 우리의 의식수준이 그 정도 단계라는 생각이 들어서 많이 씁쓸한데요. 개인의 성찰을 넘어 이제 구조적 성찰의 단계로 넘어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구조적 성찰의 단계로 가면 조용히 말해도 귀 기울이게 되지 않을까요. (웃음)
도법 : 현실적으로 무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참 많습니다. 다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석가나 예수 모두 다 말이죠. 진리의 길인가, 바람직한가를 성찰하면서 가다보면 우리 스스로 안목도 생기는 겁니다. 그렇다면 결과 때문에 상처받거나 절망하지 않고 갈 수 있어요. 달라이 라마도 티벳이 독립을 못하고 있다 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는 것 자체가 결과에요. 평화를 가꾸는 것, 그 자체가 결과에요. 매 순간순간 평화를 가꾸는 게 그 자체가 평화입니다. 뭔가 결과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건 진리의 논리를 왜곡하는 겁니다. 진리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하고 진리의 논리로 삶의 문제를 다루면 상처받거나 절망하지 않아요. 자꾸 이분법적으로 여기까진 과정이고, 여기부턴 결과라고 여기니까 가는 과정에서 절망하게 되는 겁니다. 부처는 나의 진리는 매우 현실적이고 직접적이며 지금 여기서 바로 이뤄지고 지금 여기서 바로 증명될 수 있다, 라고 했어요.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먹이는 건 바로 볼 수 있잖아요. 그게 십년 뒤에 갈증이 해소되는 게 아니잖아요. 내 눈앞에서 바로 진리가 보이고 증명되는데 상처받고 절망할 이유가 어디 있겠어요. 새만금사업이 중단되느냐 안되느냐 만으로 문제를 보면 누군가는 반드시 절망하게 되어 있어요.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개인적, 사회적으로 가치와 의미가 있어요. 정치적 사회적으로 관심이 확대되고 안목이 생기고, 사회가 새롭게 가는 흐름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가 이겼나 졌나, 해결되나 안되나로만 보면 우리 노력이 무력해지고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안목이 중요한 거죠.
양 : 스님께서 10만인 평화결사대를 만들자는 운동을 하고 계신데요. 요 근래 작은 평화운동단체들이 많이 생겨나고 나름의 색깔을 갖고 일을 하고 있는것 같아요. 저는 스님께서 하시는 운동에서 지리산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라는 슬로건이 참 반가웠습니다. 평화결사운동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졌으면 하는 염원이구요. 생명평화결사대 이야기를 좀 들려주시죠.
도법 : 평소에는 사람들이 우리 이야길 귀담아 안 들어주니까 위기상황에서 겁도 주고 그러려고 지금 이 운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모두 웃음) 반전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이나 부시나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해요. 왜냐면, 부시는 물리적인 공격이지만, 반전평화운동가들은 심리적인 공격이거든요. 부시 죽일놈, 나쁜놈 그랬잖이요. 물론 분노나 증오, 공격적이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대체로 그랬다고 봐요. 만약 부시를 공격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면 그 힘을 쓰지 않을까요? 당연히 썼을 겁니다. 그게 바로 제2의 화살인 거예요. 이걸 넘어서는 평화운동이어야 한다는 게 바로 내가 하는 지리산 평화운동입니다. 반생명 반평화적인 힘이나 소유, 공격, 독점의 논리를 넘어서서 21세기 우리 삶은 생명, 평화, 공존의 문화로 가야 한다는 측면에서 지리산 평화운동을 내세운 겁니다. 한반도 전쟁을 막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생태·생명의 논리로 문제를 풀고 비폭력, 평화의 방식으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해야 해요. 범 지구 시민들에게 한반도는 마지막 분단국가로서 빚을 지고 있어요.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고 있잖아요. 그래서 한반도 문제를 생명 평화의 문제로 해결할 때 인류사회에 진 빚을 갚고 희망을 주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요즘 반목과 대립이 너무 극심해요. 임진왜란과 구한말 직전의 상황과 너무 비슷해요. 패거리를 나누어 싸우고 있단 말이죠. 엄청난 위기상황이에요. 이런 갈등을 넘어서는 평화운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게 된 겁니다. 지리산의 상징성을 기반으로 하고 주체는 종교계였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종교계가 잘 안 움직여요. (웃음) 10만명만 죽을 각오를 하고 길거리를 누빈다면 얼마든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봐요. 10만명의 평화군 조직운동을 지속해가자고 해서 만들어진 게 지리산평화결사운동인 셈이에요.
양 : 10만명이 일시에 한 자리에 모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삶에서 그걸 실현해 나간다는 것, 네트워크를 만들어 간다는 것이 그 자체로 의미있고 참 인상적이었어요. 그런데 모성, 어머니의 품을 강조하면서 운동을 하고 계신데 실제로는 대부분 남성중심인 것 같던데요. (웃음)
도법 : 그게 관건이지. (모두 웃음) 그런데 여성들이 잘 안 나서려고 해서 문제에요. 그게 구색맞추기나 장식용이면 안되거든요. 실질적으로 남성과 여성이 명실상부하게 공동주체가 되고 역할이 주어지도록 해야 해요. 여성 종교인 기도도 추진하고 있긴 한데 이게 잘 안 풀려요. (웃음) 평화결사에 여성이 같이 주체로 서길 바라고 진행해 가려고 하는데 본인들이 앞서 나가지 않으려고 하니 말이에요. 내가 계속 설득시키면서 하자고 하는데 쉽지가 않아요.
양 : 삼보일배 이후에 해창갯벌까지 기도순례를 하는데 저도 참여를 했습니다만, 여성 성직자가 목소리를 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라 저 역시 쉽게 출발한 건 아니었어요.
도법 : 그거야 뭐 그냥 하면 되는 거예요. 그냥 하는거야, 그냥. (모두 웃음)
양 : 최근 김은국 선생님의 『순교자』라는 책을 봤는데, 하나님도 버리고 부처도 버리고 가자, 하셨더라구요. 결국 평화로 만나자는 이야기였는데, 그걸 읽으면서 민중을 위한 순교자나 평화의 순교자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도법 : 죽으라는 게 아니니까 순교자는 아니죠. 우린 살러 가는 거니까... (모두 웃음) 천명만 조를 짜서 이 사람들이 3년만 거리에서 살 각오를 하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봐요. 새만금도 6개월만 종교인이 현장에 모여서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방향을 바꿀 수 있다고 이야길 했거든요. 지금 전면 백지화, 한쪽은 또 지속추진을 주장하는데 이제는 자기 주장만 할 게 아니라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려면 끊임없이 만나고 지혜를 모아야 해요.
양 : 예. 오늘 여러 가지로 많은 말씀을 나눴는데요. 세간의 평 그대로 사회학적 언어를 쉽게 잘 풀어내시고, 이론과 실재가 풍부하게 무장된 것 같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습니다.
도법 :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웃음) 다만 그저 깊이 고민한 게 전부니까요. 나 역시 지금까지도 많이 흔들리고 방황하고 그렇습니다. 불교에 40년을 몸담았는데, 20년은 맥을 잘 못 짚어 헛 공부했고, 이제 20년 남짓 불교가 뭔지를 좀 알게 됐어요. 교무님도 힘 내세요.
양 : 예. 고맙습니다. 정말 큰 위안이 되고 힘이 됐습니다. 좋은 활동 많이 펼쳐주시고 늘 건강하세요.
도법 : 예. 나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 진행·정리-김회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