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하수'가 본'고수' 패밀리의 무용담
신귀백(2005-01-05 15:22:24)
"나는 도로의 감식가야. 수없이 많은 길을 맛보아 왔어."
영화 <아이다호(My Own Private)>에서 주인공의 독백을 들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나의 언어를 그가 대신해 주는 것 같아서였다. 늘 '길'의 유혹 앞에서 서성이던 날들이었다.
언제나 길을 헤맸으니까. 바람이 내 등을 떠밀었고, 그 길 위에서 비를 맞았으며, 때론 눈이 하얗게 쌓인 길을 걷다가 세상이 너무 눈부셔서 그만 방향을 잃어버린 적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 길 위에 사람들이 있었다.
열 살 무렵부터 나는 혼자 가는 길이 얼마나 외로운가를 알아버렸다. 명자가 주동이 되어 동네 아이들은 나를 따돌렸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왕따'시키는 셈인데, 그때는 '기죽인다'고 표현했었다. 어떤 선생님이 나만 예뻐한다는 이유였던 것 같다.
명자는 우리 동네에서 부잣집 딸이었다. 명자네 아버지는 많은 전답을 가지고 있었고, 면 소재지에서 커다란 정미소를 운영했으며, 게다가 학교 육성회장이었다. 그런 권력 탓이었는지, 내가 무얼 밉게 보였던 것인지, 아이들은 나와 놀아주지도 않았고, 얘기도 안 했다. 늘 저만치에서 저희들끼리 뭉쳐다녔고, 내가 가까이 가면 "우리 딴 데 가서 놀자."하고 또 우르르 몰려갔다.
학교를 오갈 때에도, 동네 고샅길에서도 어린 나는 너무도 힘들었다. 그 선생님이 가까이 오시면 덜컥 겁부터 났다.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지나치려 하면 선생님은 눈치 없이 이름을 부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곤 해서 나를 더욱 난처하게 했다. 늘상 명자네 밭일을 하고 돌아오시는 어머니를 보는 마음도 한없이 아팠다.
내 노력만으로 친구들과 어울리기가 힘들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까 인내의 한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혼자 다니기로 결심했다. 길가에서 자라는 풀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어디에 가면 할미꽃이 피었고, 어디에 있는 찔레 순이 통통하고 연하며 맛이 있는지 나만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학교길을 오갈 때 듣는 종달새 소리에 전율한 가슴이, 꿈속에서도 종달새 소리를 들었다.
그러면서, 혼자 걷는 길이 또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올해에 옛날의 그 명자를 만났다. 제 딸이 내가 있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너 옛날에 나 왕따 시켰지? 나, 이제 네 딸 왕따 시킨다?"
내 말에 명자는 한참이나 웃었다. 우리는, 함께 드라이브도 하고, 교외에 나가 차도 마셨다. 그렇게 혼자 가는 길을 고집하면서도, 그 길 위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그 길에서 사랑하고, 기다렸다. 때론 외면도 했다. 잠깐 스쳐가거나, 뒤돌아보거나, 그러다가 소실점 너머로 사라져간 이들도 있다.
이제, 사람을 보면 조금은 알 것 같다. 저 사람이 나와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는지. 오래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인지, 요란스럽게 다가왔으나 금세 되돌아설 사람인지, 아무리 내가 노력해도 자꾸 나와 어긋나는 사람인지…. 오래 헤맨 덕분이다.
나도 이제 어느 정도 길을 감식할 수 있을 것 같다. 길의 생리를 알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노래를 잘 부르셨다. 동네 사람들이 '우리 동네 이미자'라고 불렀을 정도로. 밤낮으로 일을 하면서도, 가난과 외로움으로 평생을 살았으면서도, 어머니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노래는 어머니에게 일용할 양식이었다.
아침이면, 흥얼흥얼하는 어머니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부엌에서 문틈으로 솔솔 파고드는 밥 짓는 냄새와 함께 들려오는 어머니의 노래 소리는 비몽사몽인 나를 서서히 현실로 불러들였다. 밭 매러 간 어머니를 찾아 나서면 어머니의 노래 소리가 밭이랑을 타고 넘어왔다.
우울려어고오 내가 와았더언가아 웃으려어고오 와아았더언가아
비이린내 나아는 부우둣가아에 이슬 맺힌 배애길호옹
저녁 무렵, 일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고단한 몸을 쉬어 줄 새도 없이 저녁밥부터 지어야 했다. 아궁이에 불을 때면 낮은 굴뚝으로 나온 연기가 토방이며 마당에 자욱히 깔렸다. 나는 그 연기 깔린 마당에서 팔짝팔짝 뛰어놀았다. 내 움직임에 따라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물러나는 연기를 보는 게 재밌었다. 그럴 때면 부엌에서 또 어머니의 노래 소리가 들렸다.
미이아리이 눈무울 고오개에 님이 넘더언 이벼얼 고오개에
하얀 연기이 앞으을 가려어 누운 모옷 뜨고오 헤매일 때에
당시인으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 채에로오
뒤돌아보오고오 또 돌아보고오 매앤 바알로오 절며어 저얼며어
끌려가신 이벼얼 고오개에 하안 많안으은 미아리이 고오개에
나는 살금살금 부엌 앞으로 깨금발을 하고 걸어갔다. 어머니를 놀래켜 주고 싶었다.
열려진 바라지문 틈에 눈을 대고 어머니를 훔쳐보다가 나는 멈칫했다. 아궁이의 불빛을 받아 주홍빛이 된 어머니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 기척을 눈치챘는지, 어머니는 머리수건으로 얼른 눈물을 찍어내고 코를 핑, 풀었다.
나는 하릴없이 바라지문에 '불조심'이라고 또박또박 썼다. 그 시절, 오두막집 나무로 만든 바라지문에는 내가 학교에서 훔쳐 온 분홍색 분필로 쓴 '불조심'이란 글자가 수없이 새겨졌다.
내가 그때의 어머니만큼의 나이를 먹어가면서 노인이 된 어머니는, 레퍼토리가 더욱 다양해졌다. 당신이 청하시면 나는 큼직큼직한 글씨로 '회심곡', '육자배기' 같은 노래들을 적어드렸다. 서유석의 '가는 세월'은 만년의 당신에게 애창곡이었다.
그리고 어느 봄날 '바우고개 언덕을 혼자' 넘어가셨다. 이듬해 봄, 나는 당신이 누워 계신 산에서 진달래꽃을 따다가 술을 담갔다.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내게 '인생은 이런 것이다.'고 설명해 주신 적이 없다. 그 대신 노래를 가르쳐 주셨다.
세상에서 내게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 무어냐고 물을 때, 나는 늘 난감하다. 사람도, 일도, 사건도, 예술도, 내 인생을 크게 변화시킨 게 없는 것 같아서이다. 그 어느 것도 나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하지도 않았으며, 영원히 내 옆에 있지도 않을 테니까.
단지, 그 안에서 줄곧 나와 함께 했던 위안이 길과 어머니의 노래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모든 것들은 순간 위에 있었다. 나는 그 순간들 속에서 꿈을 꾸었고, 무얼 찾거나 잃기도 했으며, 좌충우돌 혹은 부침(浮沈)을 거듭하기도 했다. 어쩌면 세상 어디서나 어느 순간이나 항용 있을 일들이라서, 모두 내 마음의 빛깔에 따라 작용했을 터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깊이 새기지 못했던 일들, 내 발목을 붙잡고 힘들게 했던 인연들, 좀 쓸쓸했던 날들에게도, 나는 감사한다. 그들이 있었기에, 나 자신을 돌아볼 줄 알게 되었고 사랑하게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안도한다. 더러는 헤매기도 하지만, 시행착오도 있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다는 것에. 때론 비장하게, 혹은 경쾌하고 가볍게, 그 길에서 부를 노래들이 내 가슴속에서 수없이 맴돌고 있음에도.
김저운 |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전주대 국어교육과를 나와 현재 솔빛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전북작가회의와 전북민예총 회원으로 있으며, 수필집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엔 언제나 바람이 불고』 등이 있다.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는 이달의 필자가 다음 필자를 추천하면서 바통을 이어갑니다. 이달의 필자인 김저운씨는 연극인이자 영화배우 김갑수씨를 추천했습니다.
김저운씨는 자활기관 사람들을 위한 연극 준비로 전주에 내려온 그와 얼굴을 익혔습니다. 소외계층에 대한 그의 진지하고 따뜻한 관심, 그리고 연극과 영화에 대한 열정이 무척 인상적이었다고 합니다. <태백산맥> <금홍아 금홍아> 등을 통해 보여준 강렬한 연기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고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