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 [사람과사람]
나는 판의 거름일 뿐, 꽃은 관객이라네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5-01-05 15:17:38)
'거리 소리판'에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전화를 걸었더니, 어김없이 "예, 수퍼댁입니다"라는 대답이 들려온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도 다른 이들도 모두 그를 수퍼댁이라고 부른다.
9월 20일 서울 인사동 골목, 산조예술제 또랑깡대 콘테스트에 출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재담꾼들로 '거리 소리판'이 술렁인다. 수퍼댁 김명자(38)씨는 예선 무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까페에 앉아 있었다. 보자마자 대본을 외우지 못했다고 엄살이다. 동석하던 '스타대전 중 저그 초반러쉬 대목'의 주인공 박태오(33)씨는 객지에서 보니 반갑다며 손을 덥석 잡는다.
지난 2001년 10월, 우리는 전주 전통찻집 '다문' 앞마당에서 낯선 광대들을 만났다. 점잖지 못한 요상한 복장에 사설도 제멋대로인데, 노는 폼 하나는 기가 막혔던, 이름하여 '또랑 깡대'들. 전통 판소리 다섯바탕이 아닌, 어딘가 엉성하고 우스꽝스럽지만 삶의 애환과 잔잔한 감동, 거기에 풍부한 입담과 풍자로 좌중을 압도했던 '창작 판소리'의 새 기수들이었다.
'또랑 깡대'는 전통 판소리 다섯바탕을 익히며 명창을 꿈꾸는 전문 소리꾼은 아니다. 그러나 동네 어귀에서 판을 벌이고, 전문 소리꾼의 역량에 필적할 만한 걸쭉한 입담과 소리의 맛을 흉내내던 동네 사람들의 스타, 대중들의 광대였다.
그 또랑 깡대가 산조예술제를 통해 배출되기 시작했는데, 수퍼댁 김명자씨와 박태오씨가 말하자면, 21세기 또랑 깡대 1기인 셈이다. 또랑 깡대 콘테스트가 처음으로 열린 2001년 당시, 연극을 하던 배우 김명자씨는 '수퍼댁 씨름대회 출전기'를, 전북대 한국음악과 학생이던 박태오씨는 '스타대전 중 초반 러쉬대목'을 들고 출전, 관객들의 혼을 빼놓았었다. 김치냉장고를 상품으로 타기 위해 씨름대회에 출전한 어느 아줌마의 눈물겨운 한 판 승부, 그리고 당시 컴퓨터 게임으로 전대미문의 인기를 구가하던 '스타크래프트' 초반 전투 장면을 판소리로 담아내 또랑 깡대의 면모를 확실히 재현해 냈다.
그리고 2년 후, 이들은 어느새 '훌쩍' 커 있었다. 우리 음악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깊어졌거니와 대중적 인기도 높아졌다. 지난 7월에는 '쉽고 재밌는 오늘의 새판소리 모음집'-또랑깡대 음반도 출시됐다. 얼마나 팔렸으랴 싶어 건성으로 물었더니, "2000장을 발매했는데 거의 다 팔렸다"고 대답한다. 또랑 깡대들, 얕잡아 볼 일이 아니다.
이들은 관객과 멀어진 우리 음악을 본래 판의 음악으로 돌려놓고 우리 음악이 대중들과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 서울 인사동 거리에 '거리 소리판'을 만들어 2년째 이 거리를 누비고 있다. 또 전국에 있는 다양한 행사며 축제에 불려다니기 시작했다. 수퍼댁은 각종 지역 축제와 마당극 게스트로 "정신 없이" 불려다녔고, 태오씨는 인사동 거리판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굳건히 지켰다. 얼마 전에는 모 국악방송에 '창작 판소리' 특집으로 또랑 깡대들의 활약이 전국으로 전파를 타기도 했다.
수퍼댁과 태오씨. 산조예술제 박흥주 예술감독의 권유로, 대학 졸업작품 발표를 위해 또랑 깡대 콘테스트에 출전했던 이들, 오늘날 이런 영광(?)이 오리라 짐작이나 했을까.
"그걸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땐 또랑 깡대 개념조차 몰랐어요."
인기 스타 수퍼댁, 연극쟁이였지만 발성훈련에서 소리와 민요를 익혔던 것이 기회를 만난 것이다. 검은 바바리에 검은 선글라스, 사이버 봉을 흔들며 의상부터 좌중의 웃음을 자아냈던 태오씨. "판소리 다섯바탕을 똑같이 부르잖아요. 즉흥성을 발휘하거나 관객들의 즉각적인 반응은 기대하기 어렵고요. 공급자만 있고, 수용자가 없어서야 우리 음악이 어떻게 발전합니까!“
인사동 거리를 2년 가까이 누벼온 그, 60대 노인 한 분이 또랑 깡대 공연을 통해 난생 처음으로 판소리를 접했다는 이야길 듣고 그만 뒤로 넘어가고 말았단다. 한국음악도로서 흥분할 만 하다.
우스운 이야길 잘 만들어내고 잘 불러야 하는 또랑 깡대들이지만, 소리 대중화·현대화에 대한 철학은 누구보다 확실하다.
“창작 판소리꾼들도 득음의 경지까지 욕심을 내며 그 수준을 높여갈 날이 오겠지만, 우선은 대중화를 얻고 나서 예술성을 갖춰나가는 게 순서라고 생각해요. 성음도 아니요, 득음도 하지 못한 이들이 소리를 한다고 비난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유파 때문에 판소리가 박제화되고 대중과 유리되고 있는 게 사실이잖아요.”
수퍼댁은 또랑 깡대가 연극보다 좋다고 거침없이 말한다. 연극은 많은 이들과 맞춰가야 하지만, 또랑 깡대는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서 좋다고. 물론 관객들의 반응이 즉각적이어서 그만큼 부담도 있고 두려울 때도 많다. 그래도 "혼자서 까불고 생! 난리를 떠는" 이 또랑 깡대가 그는 좋다.
지난해 수퍼댁 씨름대회 출전기 2탄으로 '다이어트 체험기'를 선보였다, 관객들의 "철저한 외면과 무반응으로 좌절"하기도 하면서, 그는 또랑 깡대의 즐거움 못지 않게 판에 대한 '책임'도 함께 알게 됐다.
"여기 이 관객들이 제일 무서워요. 재미없으면 곧바로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긴장되는 거예요. 또랑 깡대는 자유롭고 유연하다는 데에 그 정신이 있지만, 그만큼 판에 대한 책임도 크다는 걸 절감해요. 저는 연극을 할 땐 무대의 주인공이 나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또랑 깡대를 하면서 달라졌어요. 나는 이 판의 거름이고, 꽃은 관객이구나.... 박수치고 웃고 같이 호흡하는 이 사람들이 바로 주인공이구나, 그런 생각이요."
이 표현에 살을 더 붙여봐야 분위기만 다운된다. 그저 멋진 표현이라고 감탄할 수밖에.
소설가도 아니요, 오선지가 있어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이야기(사설)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음을 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을 것 같다고 묻자, 수퍼댁이나 태오씨나 같은 대답이다. "잘 된 사설은 음이 저절로 붙어요. 우리 말 속에 사설이 숨어 있다고 해야 할까?... 반대로 사설을 잘 못 짜면 음이 붙질 않아요."
그 나름의 경지야 어찌 알까마는, 우리말 자체에 운율이 있고 음율이 있다는 이야기로 이해된다. '수퍼댁 씨름대회 출전기'는 벌써 전수자가 나타났다. 이날 예선 무대에도 부산에서 올라온 한 또랑 깡대가 '수퍼댁 씨름대회 출전기'를 들고 도전했다. 태오씨가 "누나, 제자 나왔네" 하자, 수퍼댁은 "야! 이 유파니 제자니 하는 것이 또랑 깡대의 자유로움을 헤치는 거라니까! 제자 안 키운다"라며 무지른다.
태오씨도 할 말이 많다. "판소리 다섯바탕이 여태껏 보존과 생존에만 매달려왔잖아요. 이제 또랑 깡대든 뭐든 여러 곳으로 가지를 치고 더 퍼져나가야 해요. 아니, 60 먹은 노인이 판소리를 처음 들었다니 말이 돼요? 정말 슬픈 일이라니까요." 아무래도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이제 두 사람 차례가 다가온다.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엄살을 떠는데, 막상 판에 서면 또 달라질 이들이다. 관객들 앞에서 온 몸에 파릇파릇 생기가 돋아나는 걸 보니, 역시 광대는 광대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