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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 | [사람과사람]
포즈,유럽 광장에 서다
김선경 객원기자 JTV 전주방송 구성작가(2005-01-05 15:15:58)
올 여름 유럽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고생깨나 했다는 후문이다. 사상 최악의 폭염 때문에 수천 명이 사망하거나 실신했다고 하니, 그저 돈 없고 시간 없는 신세를 다행이라 여길밖에. 그런데 그 유럽 한복판으로 달려가 유럽의 기온을 적어도 1도쯤은 올려놓고 돌아온 젊은이들이 있으니, 이름하여 '포즈(pause)'다. 지난 8월 초순 KBS <제3지대>를 통해 방영되기도 했다는데, 방송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도대체 이 포즈(pause)가 어떤 포즈(pose)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백제예술대학의 가파른 캠퍼스. 최예규(33, 방송연예과2)씨가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내밀면서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반긴다. 그리고 옆에 서있는 키 큰 여학생을 소개한다. "얘가 다비예요!" 당연히 방송을 봤을 걸로 생각하고 화면 속의 다비가 바로 이 아이라고 소개한 것인데, 방송을 못 봤다는 말은 못하고 그냥 아는 척을 해본다(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정다비(23,방송연예과2)씨는 프로그램의 주연급으로 등장해서 주목을 받았다). 여기에 김영훈(20,방송연예과2)씨와 지도교수인 강남진(48,방송연예과)교수가 가세해 후일담 보따리를 풀었다.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어요. '과감한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는 쪽과 '저게 무슨 공연이야?' 하는 쪽... '꼬레아의 이름으로'라는 프로그램 제목 때문에 저희 의도와는 달리 한국을 대표하는 공연단으로 비치고 말았는데 사실은 '젊은이들의 유럽 광장문화 도전기' 쯤으로 아주 자유롭게 기획된 거였어요." ‘21박 22일의 유럽여행’에는 약간의 호사스러움이 묻어난다. 거기에다 거리공연이라니? 누가 맨 처음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해낸 것일까? "언젠가 유럽에 가서 인간조각을 아주 인상깊게 본 적이 있어요. 그걸 김제 지평선 축제에 응용했더니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2000년도에 방송연예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인간조각 퍼포먼스 그룹인 '포즈'를 만들었고 3년 동안 꾸준히 활동을 해왔습니다. 이번에도 대전동물원 퍼포먼스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뭔가 뜻깊은 일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유럽의 수준 높은 공연도 접하고 여행도 하면서 스스로 공연도 올려보는 기회를 마련해보자고 학생들에게 제안했더니 모두 좋아했어요." 문제는 여행경비였다. 프랑크푸르트-쾰른-암스테르담-파리-로잔-인터라켄-밀라노-로마로 이어지는 여정에 1인당 소요경비는 3백만 원. 학생들이 부담하기는 벅찬 액수였다. 그래서 후원자를 물색했다. 초반에는 잘 될 것 같아서 많은 학생들이 꿈을 안고 연습에 들어갔다. 하지만 출국일이 가까워져도 후원자가 정해지지 않아 결국 학생들 자비부담이 결정 났고, 경비를 마련할 수 없는 많은 학생들이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전통공연예술과 학생들이 모두 포기했어요. 같이 연습하던 사물놀이와 판소리 다섯마당이 취소되고 남은 사람들끼리 급조하다 보니 아무래도 무리가 많이 따랐죠." 학생들 중 왕언니 격인 최예규씨의 말이다. 최예규씨는 여섯 살 난 아이의 엄마이자 극단 '토지'의 단원으로 활동해온 관록 있는 배우. 뒤늦게 체계적인 이론공부를 위해 방송연예과에 입학했고 이번 프로젝트를 앞에서 이끌었다. 남편과 어린 아들이 보고 싶어서 울기도 했다는 그녀, 그만큼 고생이 자심했다. "파리 샹제리제 거리에서 공연 도중 쫓겨났어요. 주위가 궁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이라 공연이 안된다고 하더라구요. 저희들은 공연 장소나 내용을 미리 정해놓지는 않았어요. 광장의 분위기에 따라 즉석에서 출연진과 공연 스토리를 바꿨죠. 광장문화가 발달한 유럽의 문화적 토대를 믿었고 우리의 능력도 시험해볼 겸해서요. 어떤 사람들은 무모했다고 비판을 하는데, 무모했기 때문에 바티칸 시국에서는 세계 최초로 거리공연을 올릴 수도 있었어요." 바티칸 시국은 교황의 무덤이 자리한 성소로 절대로 공연을 올릴 수 없는 금기의 장소. 카메라 철수를 요청하는 바람에 TV 촬영은 못했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공연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공연을 올린 것일까? "한국 전통의상을 입은 인간조각 퍼포먼스를 메인으로 하고 분단국가라는 현실 때문에 평화의 메시지도 전하는 게 좋겠다 싶어 평화 퍼포먼스도 간간이 삽입했습니다. 또 프로그램의 밋밋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물, 민요, 판소리, 태권도 등을 짧게 보여주기도 했구요." 인간조각 퍼포먼스는 나무꾼과 선녀, 흥부와 놀부, 혹부리영감과 도깨비, 심봉사와 뺑덕어멈 같은 선악의 대비를 주 테마로 구성했고, 의상은 전주한지로 만들었다. 동행한 김숙희(31,뮤지컬과)교수가 영어로 스토리를 설명했고 때로는 학생들의 서툰 영어가 동원되기도 했다. 반응은 '팁'으로 돌아왔다. "팁 문화에 적응하기가 참 힘들었어요. 팁 박스를 없앴는데도 신발이나 모자 속에 넣어주기도 하고 손에도 쥐어주는 통에 거절하기가 힘들더라구요. 한번은 악기를 치는데 악기 속에 돈을 넣는 바람에 악기를 못 친 일도 있었어요." 가는 곳마다 주목을 받았던 정다비씨의 말이다. 다비씨는 TV출연 후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와 내년 봄 공포영화에 출연할 계획이라는데, 그 전에 돈을 모아서 다시 유럽에 다녀올 생각이란다. 공연 위주로 다니다보니 금쪽 같은 유럽 5개국을 돌면서도 제대로 느낄 여유가 없었다고, 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유럽의 한복판에 서볼 생각이란다. "유럽 사람들이 우리 전통의상을 보면 '아 한국사람들 왔구나, 웬일이지?' 할 줄 알았는데 천만에요. 반가워서 달려오는 사람들은 한국사람들뿐이었습니다. 전통의상을 입고 공연을 해도 '일본인이세요? 중국에서 오셨어요?' 하는 외국인들이 더 많았어요. 어떻게 하면 한국을 알릴까 고민하다가 네덜란드에서 태극기를 구입했어요. 그때부터 태극기를 펼쳐놓고 공연을 했죠." 한국에서도 안 사봤던 태극기를 외국에서 샀다며 다비씨는 감격해 한다. 막내 영훈씨는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슈퍼맨처럼 시내를 돌아다녔단다. 동행했던 교수들의 고생도 후일담의 한켠을 차지한다. 분장과 의상을 갖춘 배우가 짐을 들고 가는 것은 보기에 안 좋다면서 동행한 이선저(41.특수분장 전문가), 김숙희 교수가 무거운 짐을 들고 나르며 궂은 일을 도맡아했다. '코리아 원더풀!'을 외치는 관객들을 보면 힘이 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현지 퍼포먼스 팀과 한 장소에서 맞붙으면 우리가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습니다. 유럽의 인간조각 퍼포먼스는 예술의 경지에 다다랐죠. 체격조건이나 실력으로나 우리는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 한사람의 눈길이라도 더 끌어보기 위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강의실에서는 배울 수 없는 큰 공부를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강교수는 내년에는 동남아 쪽으로 진출(?)해볼 생각이란다. 올해와 다른 점은 뭔가 확실한 '홍보목표'를 정한다는 점. 퍼포먼스를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딱히 알릴 것이 없었던 이번 경험 때문이다. "공연을 통해 뭘 홍보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구요. 백제예술대학을 알리는 것도 아니고 그룹 '포즈'를 알리는 것도 아니고...정확한 홍보 목표가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그러면서 강교수는 "배낭문화 사절단"을 제안한다. 축제를 알리는 학생 홍보사절단인 셈인데, 판소리와 마당극 퍼포먼스를 가지고 세계를 돌면서 소리축제를 홍보하는 식이다. 게릴라식으로 세계를 휘젓고 다녀보자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기량을 닦아서 공연의 질을 높이는 과제가 남았다. 이번에는 많은 흠들이 '첫 도전'이라는 수사에 가려 드러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사뭇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뜨겁게 달아오를 내년 여름을 기약하며 그룹 포즈는 지금부터 연습에 들어간다. 낙엽이 지고 흰눈이 내리고 다시 꽃피는 봄이 올 때까지, 퍼포먼스 그룹 포즈에게는 한순간의 포즈도 허락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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