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 [특집]
막걸리가 익어가던(?) 녹두골 연슬실
감홍관 전 녹두골 단원(2005-01-05 15:09:52)
전주지역의 문화활동가들이 모여 '녹두골'이라는 문화운동 단체를 결성한 것이 벌써 20년 전의 일이 되었다. '백제마당'이라는 대학가의 동아리가 '의병한풀이' 마당극을 끝으로 지역문화운동을 표방하고 대학의 울타리를 넘은 것이다.
당시 녹두골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풍물이라던가 탈춤 등의 강습을 하였었다. 우리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기라 많은 분들이 강습을 받았는데 강습이 끝난 후에는 항시 막걸리를 동반한 뒤풀이 자리가 이어지곤 했다. 땀을 흠뻑 흘리곤 난 후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의 맛이란 참 별미였었다. 그 맛이 너무 좋아서였을까, 강습은 뒷전이고 뒤풀이가 주목적인 강습생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었다.
뒤풀이가 뭐길래 그리도 재미있었을까.... 하기야 노래방 기계도 없던 시절, 막걸리 몇 사발에 취기가 올라오고 흥이 나면 손에 잡힌 젓가락, 숟가락을 두들기며 민요 한 곡조 뽐내던 재미가 어디 그리 흔한 것이던가! 그렇게 녹두골은 사람들이 모여 우리의 문화를 배우고 한편으로는 암울한 시대의 분노를 늘어놓기도 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그런 녹두골 한 구석에는 누군가 시위현장에서 주워 온 불발된 최루탄이 하나 있었다. 이 놈은 한 동안 녹두골에 드나드는 사람들의 관심거리였다. 만져도 보고, 뇌관을 두들겨도 보고, 뇌관을 때리는 공이를 뒤로 당겼다 놓아도 이 놈은 도무지 반응할 줄을 몰랐다.
어느 날인가 뒤풀이 도중에 술이 떨어졌다. 바로 각설이가 등장하여 즉석 모금을 시작했다. 꽹과리를 뒤집어 들고 각설이 타령을 그럴 듯하게 내지르며 한바퀴 돌았지만 영 시원찮았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은 어김없이 맛간 최루탄이 등장했다. "동전들 털어!! 차비라도 털어!! 안내면 터뜨려버릴거야!!!". 그 짓도 한 두 번이지, 맛간 최루탄 들고 설쳐봤자 얼마나 신통하겠는가. 협박을 포기한 친구는 최루탄을 술상에 놓고 막걸리를 사러 나갔고 우리는 잔을 들어 남은 술을 비우기 시작했다.
"이건 말이야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많이 다뤄봤지, 이건 이렇게 하면 터져" 얼마 전 제대하고 놀러 와 같이 술잔을 비우던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고 이어 "딱"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조금 후 "펑"하는 소리도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소리난 곳을 바라봤다. 그 선배는 마치 고등학교 졸업식에 허옇게 밀가루를 뒤집어 쓴 학생과 같은 몰골로 눈만 끔벅이며 앉아 있었다. 모두가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아무도 맛간 그놈이 터졌다고는 믿지 않았던지, 아니면 너무나 순식간의 일이라 아무 생각도 들
지 않는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밖으로 나가!!" 아무런 정신이 없었다. 무작정 뛰쳐나와 동네 담벼락을 붙잡고 몸을 뒤틀었으니까... 눈물, 콧물, 침 그리고 실컷 먹은 막걸리까지 죄다 흐르고 있었다. 슬쩍 옆눈질을 해보니 서넛은 더 나와 비슷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그러나 술잔은 그냥 들은 채로 담벼락에 머리를 쳐 박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온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왜 이렇게 맵디야" 동네 아줌마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틀어 놓은 10대의 환풍기가 최루탄 가스를 열심히 동네에 퍼트리고 있던 것이었다. 파출소에서 주민 신고를 받고 나왔단다. "뭐가 터졌습니까?"," MH3요.", " 아! MH3요.", "다친 사람은 없습니까?","예! 별일 아닙니다." 경찰은 그냥 그렇게 돌아갔다. "야! 근데 MH3가 뭐냐?","거 뭐 암모니안가 그런 거 있잖아요..", "이런 무식한... 그게 NH3지, 에라 이 누가 문과 아니랄까" 어찌되었던 사태 수습은 되어가고 있었다. 몇 번을 쓸고 닦아도 맵기는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강습이 이루어질리 만무했다. 눈물을 흘리며 강습을 했고 받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재미있어라 하는 표정들이다.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모두들 싱글벙글이다.
그렇게 그렇게 그 해 가을이 저물어 갔다. 이제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묻혀 어느덧 아득한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지금도 20년 전 녹두골이 있었던 그곳을 지나노라면 눈길이 가 닿는다. '저기에 내 청춘이 통 채로 묻혀 있어'. 그 때의 그 사람들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