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 [특집]
'표구사 화랑'.그리운 시절
정춘실 진안부귀중학교 미술 애호가(2005-01-05 15:08:48)
우선 고백부터 하자. 토박이도 아니요, 내력 또한 별무한 처지에 70년대말 전주시내 "미술의 거리"를 회상 하자니 좀 캥긴다. 하지만 무식한 자 용감하다니 기억나는 대로 풀어갈밖에.
서가의 낡은 인상파전 도록을 펼쳐니 27년 전 모네의 <수련>앞에 선 날의 충격이 생생하다. 선명한 색채와 부드러운 터치, 햇빛 하늘 물그림자와 함께 꽃망울 터지는 소리.....
그랬다! 더 이상 화집이나 도록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된 날. 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진 날이다. 76년 4월5일, 덕수궁 석조전에서의 사건 이후 원작감상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보름에 한번 읍내를 나가고 월급이나 타야 집에 가는 시골학교 햇내기 선생이라 그저 독서신문의 표지그림을 자취방 벽에 붙이거나 월부로 들여논 금성사판 미술전집을 들여다보며 애를 삭이는게 고작이었다.
그러다 전주로 시집온 덕에 전시장과 화랑을 찾아다닐 수 있었다.
그 무렵 전주에 제대로 된 전시장은 없었다고 기억된다. 개인전이나 그룹전이 주로 다방에서 열렸는데 한소희선생 작품을 처음 본 것도 다방전시였다. 서울에서 내려온 유명인사의 전시도 중앙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전주 시립도서관 자리에서 열렸다. 해강 유근형의 청자 개인전도 그곳에서 열렸는데 끌탕만 하던 기억이 새롭다. 청자의 비색을 실현한 분으로 들썩하던 판에 나뭇잎 형태의 술잔 일습이 얌전해 탐이 났지만 워낙 비싸 엄두를 못냈었다. 대신 그 제자벌 되는 이의 작품 한 벌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땐 그림에 대한 정보 역시 적었다. 전문화랑은 고사동에 월담미술관(백제화랑)이 있었고, 대부분 표구사에서 화랑을 겸했다. 다방이고 음식점이고 간에 좀 이름났다는 집엘 가면 산수화 한 두점은 기본이었으니 표구사는 활황이었고 거래도 한국화 중심이었다. 휴일이면 중앙동에 나가 옛 그림 글씨 고가구 민예품을 보거나 서울에서 열리는 대형전시를 보러 가는 거사를 감행했다. 이럭저럭 그림감상에 이력이 붙어 재미난 일도 생겼는데 신혼여행비 아껴서 산 첫 작품을 몇 년 후 다른 작품과 바꾸기도 했고 큰애 돌잔치 축금으로는 제법 좋은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다. 월담미술관의 월담선생을 뵙고 작품에 자문을 받기도 하고 소장작품을 볼 기회도 가졌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눈에 든 작품값을 준비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전시장 순례야 시간과 관심만 있으면 가능하다. 그러나 맘에 드는 작품을 소장하려면 힘든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가계부 순위에 밀려 마음뿐이니 눈호사나 실컷 하는수밖에 없다. 따져보면 젖배부터 곯기 시작해 볼거리 읽을거리 가 참 말이 아니던 시절에 성장했으니 지금껏 혹하는 게 당연한지 모르겠다.
지금은 예술회관 얼화랑 서신갤러리 민촌아트센터 솔화랑 등 전시공간도 넓고 전시도 다양하다. 야간열차타고 서울역에 내려 눈곱낀 얼굴로 물어물어 덕수궁을 찾아가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아! 옛날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