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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 | [특집]
언감생심,무대위 천장은 고사하고..
문치상 원로 연극인(2005-01-05 15:05:47)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1950년대의 공연장은 매곡교 밑 가설극장과 나중에 오스카-아카데미극장 등으로 이름이 바뀐 백도극장이 기억에 남는다. 이곳에서는 국극, 신파극등이 주류를 이루었고 가설극장은 대체로 민간요법 약이나 생활용품등의 판매를 목적으로 했고 백도극장은 당시 여성국극이 대성황을 이루었다. 화장실 창문을 뜯고 들랑거리다가 나중엔 그마저 들켜 어른들 틈새에 끼어 무료입장을 했고 그것도 여의치 못해 정식으로 극장 간판 그리는 곳에서 등교마저 팽개치고 페인트통을 날라다주거나 밑그림칠을 해주면서 백도극장의 출입은 자유로워졌다. 그래서 웬만한 국극은 안 본 것이 없었다. 당시의 백도극장은 지금의 전북예술회관 건너편에 있었다. 그때의 내 꿈은 연극인이 되는 것이었고 고등학교때는 방송국의 프로듀서가 되고 싶었는데 결국 신문쟁이로, 어설픈 연극인으로 인생 마감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의 동적예술무대는 전주극장, 오스카극장등의 영화관이 유일했다. 그래도 비교적 무대의 넓이가 컸기 때문이다. 물론 연극을 하기 위해서는 거푸집을 이용해서 앞으로 달아내기도 했다. 당시 조명은 오직 카본을 이용한 조명키뿐이었고 객석 맨 뒤쪽 중앙과 좌우 양쪽에 설치했을 뿐, 음향도 녹음기에 마이크를 사용한 때였으니, 배우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면 족했다. 그것도 여의치 못해 전북대 강당 또는 다방을 빌려 연극을 했다. 예총이 탄생한 62년이후 몇 번의 회장이 바뀐 후 지금의 전라회관 자리의 공보관이 전시와 소규모 공연공간으로 사용됐고 67년 현 전북예술회관 자리에 시민문화관이 자리잡았다. 국경일 행사장 구실이 더 큰 몫을 차지한 건물이었지만 그래도 1,000석 규모의 대극장이었다. 물론 조명 음향 등은 거의 갖추지 않은 상태였지만 예술인들의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어느땐가는 고 이춘성지사가 무대위 천장을 막는 바람에 고 박동화선생을 비롯한 무대예술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결국 거센 반발로 새로 만들어진 천장이 뜯겨지기도 했다. 무대위 천장은 대들보와 가로 세로 연결된 기둥에 어설프지만 각종 조명기가 달려있는 등 어수선하고 무대장치가 메 달려 오르내리는 등 긴요한 공간인데 문공부차관출신인 이 지사가 행사도중 천장을 막도록 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었겠는가. 당시 연출과 배우는 스텝일을 겸해야했다. 연출자는 조명 음향효과, 배우들은 소도구와 소품, 의상과 분장 등은 당연한 것이었고 무대장치의 시설과 철거, 그리고 천장에 올라가 종이가루를 뿌려 눈 내리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도 고등학교 3학년 때 맥베스에 출연하면서 마그네슘을 터뜨리려고 무대에 설치된 전기선의 합선으로 불이 나 엉덩이로 뭉개면서 연기하는 바람에 지금도 그때의 상처가 남아있으니까... 그 덕에 동국대 연극영화과의 무시험 합격증은 받았지만. 1974년5월 공보관에서 개최된 도전(道展)개막식때 당시 황인성지사가 1백만원의 성금을 내놓는 등 적극적인 도움으로 전북예술회관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성금모금에 나섰다. 처음엔 전시관으로 계획됐다가 나중에 극장이 포함되어 맨 위층이 공연장이 된 것으로 기억된다. 77년까지 완공목표를 정했지만 당시 건축비와 부지매입비 2억여원을 마련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부지매입비로 전주시립도서관(현 성모간호보조원)을 인수하여 예술회관으로 활용했다. 1982년 2월 시민문화관이 헐린 자리에 전북예술회관이 들어섰다. 이밖에도 언젠지는 모르지만 반공회관(현 덕진예술회관)이 교육장을 겸한 극장시설을 갖추었고 80년대 중반에는 전북연극회관, 황토, 월이, 창작소극장등이 문을 여닫으면서 오늘로 이어지고 도립국악원도 300석규모의 극장을 갖게되고 관공서의 강당도 극장형태를 갖추게 됐으니 이젠 무대공간이 없다는 푸념은 할 수 없게 됐다. 이후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를 계기로 전북대 구내에 1,700석규모의 삼성문화관이 문을 열고 2001년 한강 이남에서는 제일 큰 한국소리문회의전당이 우뚝 이 고장에 들어섰으니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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