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 [특집]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명멸해 오다
김회경 문화저널 기자(2005-01-05 15:02:08)
무대는 창작인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다. 열정과 땀의 결정체를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교감할 수 있을 때 창작인들의 존재는 마침내 세상 밖에서 빛을 낸다. 창작인과 관객들의 만남, 그 가교가 바로 무대공간이다.
시대와 함께 명멸해 온 무대공간. 시대에 따른 문화예술의 위상과 문화예술정책의 흐름, 경제적 여건 등에 영향을 받으며 발전해왔지만, 소박하면 소박한대로 화려하면 화려한대로 문화예술인들의 의식과 꿈을 담아내며 더불어 변화하고 성장해 왔다.
과거 60~70년대에 비하면 지금의 지역 공연공간은 그야말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양적인 팽창은 물론, 규모와 특성화 면에서도 일정한 성과를 일궈냈다. 문화예술이 각광받는 시대에도 여전히 지역 문화예술인들은 가난을 멀리 물리치지 못했지만, 공간이 없어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던 과거에 비하면 적어도 무대공간의 확보 면에서는 풍요로운 환경을 맞고 있다.
과거 문화예술인들은 발표공간의 절대적 부족을 개탄했지만, 지금은 하드웨어의 부족을 논하기보다 그 속에 무엇을 채워넣을 것인지 소프트웨어에 더 많은 고민이 실리고 있다. 게다가 전문 창작인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문화 향유 욕구가 높아지고 창작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무의미해지고 있어 공연공간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운영자들의 전문성과 전략, 그리고 공간별 성격의 차별화 등이 앞으로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슬레이트 지붕, 벽돌 건물에서 시작
시대의 파고를 함께 넘으며 창작인과 관객들의 각별한 동반자로 존재해 온 무대예술공간. 멀리 19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시민문화관(1967년 개관)을 만나게 된다. 현재의 전북예술회관 자리에 위치했던 시민문화관은 700석 규모를 갖춘 유일한 공연장이었다. 무대예술을 위한 전문 공연장이기보다는 사람들이 모여 행사를 치르기 위한 행사장으로서의 기능이 훨씬 더 강조된 공간이었다. 당시엔 연극이 무대공연의 대부분을 차지했는데, 지금의 원로나 중견 연극인들은 이곳을 열악했지만 당시의 유일한 공연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원로 연극인 문치상씨는 "슬레이트 지붕에 벽돌로 지은 건물인데 방음이나 음향시설이 갖춰질 리 없었다. 조금씩 어두워지거나 조금씩 밝아지게 하는 기본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없어 그저 켜졌다 꺼졌다만 할 수 있는 조명시설뿐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전국 어딜 가더라도 대부분 그런 조악한 환경에서 무대예술이 공연되던 때였다"고 설명한다.
그나마 시민문화관이 건립되기 전에는 전주극장이나 코리아극장 등 영화상영을 위한 극장이 각종 연예공연이나 쇼를 비롯해 연극까지 소화해내는 '다목적 공간'으로 쓰였다. 70년대 들어서는 소극장 형태로 다방이 애용됐다. 당시의 설다방은 전시공간뿐 아니라 연극인들이 작품을 올리는 이른바 '살롱 연극'의 시대를 이끈 주역이었다. 70년대 초반 전주우체국 4거리에 있었던 공보관(전라북도에서 운영) 역시 5평 남짓한 무대와 200~300석을 갖춘 소극장 무대로 자주 이용됐다. 다방과 공보관 등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는 평면이었다. 무대 공간이 이럴진대 대형 공연물이 올려질 리 만무했다. 연극은 소인극이나 단막극, 무용은 독무, 음악은 독주나 독창 등의 공연이 주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당시엔 공연장 못지않게 연습공간에 대한 예술인들의 갈증도 만만치 않았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고 했던가, 빈 사무실을 전전해가며 아슬아슬한 토막 연습을 이어가야 했다.
원로 예술인들은 70년대를 받쳐준 주요 무대공간으로 카톨릭센터 회의장을 빼놓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대관료가 턱없이(?) 저렴했던 때문이었다. 카톨릭센터가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감안해준 덕택으로 이곳에서 가장 많은 공연이 이뤄졌다.
공연 갈증 풀어준 민간 소극장이 있었기에…
1983년 전주시 다가동에 지역 최초로 연극 전용 소극장 간판이 올려진다. 당시 활동했던 극단 '갈채'에 의해 문을 연 지하 60평 규모의 전북문예소극장. 연극인들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소식이었지만, 문예소극장은 운영 두 달만에 재정난 등의 이유로 문을 닫았다. 이것을 전북연극협회가 인수하고 전북연극회관으로 이름을 바꿔 전국 최초로 직원 월급제를 도입, 소극장 운영의 전문성을 강조하며 야심차게 꾸려갔지만, 역시 만성 적자의 벽을 넘지 못하고 운영 6개월만에 문을 닫고 만다.
이후 전문극단, 고급연극의 기치를 내걸고 극단 '황토'가 1986년 60석의 소규모 객석을 갖춘 황토예술극장을 개관하고 상설연극전용극장의 가능성을 실험하기도 했다. 연극인들이 후원회를 조직해 기금을 마련해가며 끈질기게 버텨 5년여동안 지역 시민들에게 관극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80년대 후반 들어 개인과 기업 등 민간이 운영하는 무대공간이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소극장 '예루'가 1987년 전주대 김광순 교수에 의해 문을 열어 무대공연과 갤러리 시설을 갖추고 활발한 예술기획을 벌이며 90년대 후반까지 굳건한 입지를 다져왔다.
1991년 설립돼 전시와 공연, 시민강좌 등을 진행하며 지역 문화예술의 역량을 결집시켰던 우진문화공간도 빼놓을 수 없는 문화공간이다. 기업인의 투자로 운영됐던 우진문화공간은 자체 기획위원을 구성, '우리소리 우리가락' 시리즈를 비롯해 국악 관련 기획공연의 비중을 늘려가고, 도내 미술대학 졸업생들의 발표 무대를 통해 신인작가를 발굴하는 등 문화예술공간 운영의 전문성과 기획력을 높여냈다.
1990년 문을 연 창작소극장은 연극을 전문으로 하는 소극장으로 지역 연극을 활성화하고 그 토대를 닦는 첨병 역할을 담당했다. 후원회원과 관극회원제 등의 도입으로 재정적인 부담을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면서 10여년 넘게 지역 연극의 산증인으로 여전히 건재해 있다.
같은 해 전주시 기린로에 자리잡은 '아사달' 역시 개인이 운영하는 문화공간으로는 8년이라는 짧지 않은 경륜을 이어오며 지역 문화예술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놓은 장소다. 당시 권오표 시인이 소극장운동의 하나로 시작한 '아사달'은 매달 한 차례의 시낭송회와 전북 최초의 판토마임 기획공연, 연극 <스트립티스> 매일공연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던 공간이다. 특히 한국 마임 1세대로 불리는 유진규, 임도환씨 등을 전주로 초청해 마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여내면서 마임이스트들에게 힘을 실어준 공간으로 기억되고 있다. 운영 8년동안 300회가 넘는 공연을 벌이며 열린 문화공간으로의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지만, 운영자의 의지를 뒤따라가지 못하는 척박한 지역 문화인프라나 두텁지 못한 문화예술 향유층으로 현실적인 난관에 부닥쳐 그 맥을 잇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1992년 전주시 효자동에 자리잡은 바리톤소극장은 개관 당시 레스토랑과 클래식 공연을 병행하는 형태로 운영되다, 성악가 우인택씨가 1994년 70여평의 작은 무대를 인수하면서부터 순수 클래식공연을 전문으로 하는 소극장으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2백여회가 넘는 공연횟수에 무대에 선 공연자만 1천명을 헤아리면서 대형공연장을 중심으로 무대가 올려지는 클래식 음악 분야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지난 2000년 문을 연 전주시 서신동의 한솔문화공간도 민간 경영을 통해 소극장만의 아기자기하고 특색 있는 기획을 마련하고 착실히 연륜을 쌓아가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상설인형극과 지역 예술인들의 작은 음악회, 테마가 있는 음악감상실, 지역 재즈그룹의 상설공연 등 의미 있는 시도들이 눈길을 끄는 공간이다.
이밖에도 어려운 환경에서 민간이 운영한 문화공간은 전주 이외에도 군산의 동인아트홀, 익산의 문화공간 '뿌리' 등이 80년대 후반 소극장을 운영하다 극장의 민간 경영이 결코 만만치 않다는 점을 재확인하며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관의 부속시설로 들어선 전북예술회관은 건립과정에서 부지선정과 설계, 용도 등의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다 지난 1982년 전주시 경원동에 완공된다. 782개의 객석을 갖춘 공연장과 6개의 전시실을 확보하면서 문화예술인들의 대표적 문화공간으로 자리잡게 되지만, 늘어나는 문화예술인들과 수용자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90년대 들어 포화의 한계가 공론화되면서 새로운 복합문화예술회관이 필요하다는 데에 여론이 실린다. 새 복합문화예술회관 건립은 부지선정과 예산확보 등으로 수년동안 공전과 난항을 거듭하다, 마침내 지난 2001년 9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웅대한 위용을 드러내며 '민간위탁'이라는 쉽지 않은 여정을 걷고 있다.
문화예술이 본격적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21세기 들어 하드웨어 구축을 위한 관의 정책은 더욱 활기를 띠었다. 각 동에 들어선 문화의집이나 전주 한옥마을에 자리잡은 문화거점시설, 임실 오궁리미술촌과 장수 장안문예촌 등 폐교를 활용한 창작 스튜디오 개설 등도 문화예술인들의 창작의욕을 높이고 무대 공간의 다양화를 촉진시키고 있다. 여기에 전주에 자리잡은 '자코'와 '투비원' '레드제플린' 등 실험적인 락음악과 전통공연 등의 문화공연을 올리는 개인영업공간도 주목을 받으며 지역문화예술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공간이 없어 빈 사무실을 전전해야 했던 과거에 비한다면 실로 눈부시고도 풍요로운 변화들이다. 그러나 무대예술공간이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창작에의 열정을 풀어놓을 상시적 연습공간이나 창작공간이 부족한 불균형 현상은 정책적 지원이 뒷받침되어야 할 부분이다.
무대공간 운영자들의 입장에서는 예술인과 수용자를 앉아서 기다려서는 생존할 수 없는 시기를 맞고 있다. 문화예술의 새로운 경향과 흐름, 그리고 예술인들의 변화된 의식들을 예리하게 포착하면서 공간 운영의 차별화와 전문화, 특성화를 꾀해야 할 시점이다. 공간 운영자들의 참신한 기획들은 지역 문화예술의 역량을 확대하고 문화예술인들을 폭넓게 끌어안을 수 있는 소중한 자양분이 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 역할이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