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 [특집]
찻집에서 갤러리까지...
문화저널(2005-01-05 14:58:34)
70년대 다방에서 시작하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딱히 전시공간이라고 할 만한 장소는 없었다. 다만 사람들의 왕래가 많고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사랑방 역할을 하던 곳이 바로 '다방'. 지금은 다방이라고 하면 퀴퀴한 냄새가 나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만 출입하는 싼 찻집정도로 생각이 들겠지만 그 당시 다방이 가지고 있는 힘이라는 것은 꽤 커다랗게 작용하고 있었다. 문화를 만들어내고, 즐기고 공유하던 장소였던 것이다. 미술인들도 마찬가지로 전시공간이 없는 상태여서 다방의 비워진 벽면을 채워 자신의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지금의 전시개념과는 거리가 좀 있겠지만 그런대로 고급한 인테리어의 개념을 넘어선 전시를 보여주었다.
전주에서도 여러 곳의 다방이 전시공간으로 활용되어 어떤 작가가 전시를 하느냐에 따라 다방의 성격도 만들어지고 나름대로 레벨도 형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전주에서 유명한 곳은 예전에 중심지였던 전주우체국을 중심으로 있던 설다방, 금란다방, 에덴다방, 옥다방, 명다방 등 여러 곳에서 작가들이 전시하였다. 그러나 주로 문인화, 한국화가 전시되었고, 어느 정도 유명세가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설다방이나 에덴다방의 경우 왠만큼 유명하지 않으면 전시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자존심이 대단하여 차별화를 두고자 했으며 많은 화가들이 전시하기 위해 몰려들었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젊은 작가들이나 서양화가들은 그런 기회를 얻기조차 힘들었다. 그래도 다행히 옥다방, 명다방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전시할 수는 있었다. 마치 차별화된 전시의 성격을 보여주듯이 다방의 전시문화가 형성되었다. 어찌보면 다방에서의 전시는 민중앞에 더 가까이 작품이 다가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일부러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다기 보다 그저 생활중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작품에 대한 거리감이 적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방형태는 전시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공간안에서 배경으로 보여지는 공간의 일부분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다방형식의 마지막 형태 '사리문 다방'
전북도청앞에 있었던 '사리문 다방'은 다방이라고 하기보다는 완전한 전시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다방이었지만 1977년 유휴열씨가 인수하여 전시공간으로 개조하고, 전시를 위한 공간으로 만들어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름도 다방보다는 '사리문 화랑'이 더 맞을 듯 하다. 그곳은 작은 공간이었지만 나름대로 의미를 가져본다면 작품이 공간안에서 제대로 주인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고 여러 가지 문제로 문을 닫게 되는 실정에 놓이게 된다. 당시 작품들은 권력기관에 뇌물이나 상납의 물품으로 많이 통용되고 있어서 전시가 곧 권력기관과의 결탁으로 연결되어지다보니 그만큼 제재의 손길도 많았다. 이런 이유로 전시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했던 사리문 다방을 마지막으로 다방형태의 전시공간은 사라지게 되었다.
80년대의 본격적인 전시공간 '전북예술회관'
전북예술회관의 시작은 곧 다방형태 전시공간의 쇠퇴를 알렸다. 예총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전북예술회관은 작가들에게 그야말로 전시를 위한 전시공간이었다. 지금도 작가들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만큼 예술회관은 많은 전시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전북미술계의 현장이다. 70년대 말 처음 예술회관이 자리를 잡은 곳은 지금의 성모간호교육원 자리였지만 곧 작가들의 자체적인 건립모금으로 현재의 전북예술회관이 만들어졌다. 그만큼 전시공간에 대한 필요성과 미술의 활성화를 위해 작가들 스스로 만들어 낸 노력의 결실이다. 그 만큼 예술회관은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처음 의도했던 공간 구조와 달리 굴곡진 벽, 가운데 자리잡은 기둥과 건물 중앙에 길게 만들어진 계단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본격적인 전시공간의 탄생은 작가들의 전시에 대한 의식변화와 함께 전북미술계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 외에도 전시공간으로는 백제화랑이 작게나마 기획화랑으로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콜렉터가 만든 공간이어서 주로 수집한 작품들이 전시되었고, 기획전으로는 꽤 유명한 작가들의 초대전을 여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공간과 차별화를 두고 격조있는 전시를 만들어 나가려고 했다. 또한 작품가격을 형성하여 상업적인 역할에도 큰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은 재정적인 문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상업화랑의 원조 '표구사'
화랑이라는 이름과 함께 표구사는 두 가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처음에는 표구만 하는 상업적인 장소로 여타 다른 기능없이 그저 단순한 기능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장소에는 많은 작품들이 오고가는 집합지였다. 작품을 맡기고 표구해서 찾아가는 등 소유자가 정확하긴 하지만 유동하는 작품의 숫자만을 보자면 왠만한 전시장을 넘어서게 된다. 그러다 보니 소위 장사 잘 되는 표구사는 그럴싸한 쇼윈도우를 만들어 여러 가지 형태의 표구제품을 디스플레이 해놓게 되는데, 여기에 수반되는 것이 표구되어진 작품들이다. 당연히 표구는 작품과 함께 보여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점점 표구작업 뿐만이 아니라 작품의 매매역할로까지 확대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카달로그를 만들만한 전시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디스플레이만 되어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그렇게 표구사의 역할은 단순했다. 그렇지만 표구사에는 비공식적인 경로로 들어 온 작품들이 많아 작품가격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채 판매되는 경우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구매자들도 화랑보다는 표구사를 낮은 가격 때문에 선호하다보니 그런 초기적인 상업적 화랑형태가 만들어지게 된다. 이렇게 표구사의 활동영역이 점차 넓어지면서 몇몇 표구사들은 나중에 본격적인 화랑형태를 띠며 상업화랑으로 문을 열게 된다. 그렇지만 미술시장의 한계에 부딪쳐 화랑을 그만두고 다시 표구사의 형태로 되돌아가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상업화랑으로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곳도 없지 않다.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투명한 유통과정과 제대로 된 작품가격의 형성만이 미술시장을 오래도록 지속시킬수 있다는 것이다.
90년대 이후 다양화된 전시공간
미술계의 활성화와 함께 90년대에 접어들면 전북예술회관을 비롯해 사설 화랑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이들 사설화랑들은 상업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전시를 기획하는 역할에 더 비중을 두는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얼화랑'과 '우진문화공간'은 십여 년을 거치면서 작가 발굴하는 여러 전시를 기획하고 젊은 작가들에게도 공간을 제공하면서 미술계의 활성화를 주도해 나간다. 그 외에도 90년대 중반 '정갤러리' 민촌아트센타'가 개관하면서 각각의 화랑들은 그 성격을 만들어나가 다양화된 모습으로 더욱 전북미술계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특히 출발부터 확실한 성격을 가지고 특성화된 화랑으로 유일무이한 '온다라 미술관'은 민중미술의 활성화를 높였다는데 그 의미가 크다. 더불어 입장료를 받는다거나 자료집을 판매하는 등 화랑의 위상을 정착하고자 했다. 그러나 6,7년 정도 운영을 하고 아쉬운 막을 내렸다.
그리고 97년에 개관한 '서신갤러리'와 그 즈음 함께 한 '경원아트홀'이 동참하면서 미술시장은 팽창하게 된다. 주로 젊은 작가의 발굴에 크게 기여한 서신갤러리는 사설화랑이지만 지금도 상업적인 성격보다는 기획전에 큰 의미를 두고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2000년에 만들어진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전시실'은 처음 전북예술회관이 생길 때 가졌던 기대와 설레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전문인력의 부재와 전시공간구조의 미비로 아쉬움만을 낳게 되었다. 지금은 전문 기획자도 자리를 잡고 공간도 개선해 나가고 있어 다시 한번 전북 미술계의 활기를 기다려 본다. 또한 전원 속에 새로운 전시환경을 만든 '오스갤러리'도 나름대로 큰 무리없이 전시를 치뤄내며 한 부분을 자리잡고 있다.
현재 미술시장은 침체된지 오래되었다. 전북의 많은 화랑들도 자생하지 못하고 재정적인 이유로 사라져 간 아쉬운 화랑들도 있지만 아직까지도 그 속에서 10여년을 지켜온 화랑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 고맙다. 그러나 운영이 어려운건 여전하여 좋은 전시를 기획하고 작가발굴에 힘을 쏟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작가층에 비해 공간들이 넘쳐나는 실정이어서 그 어려움은 더욱 커지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건 특성화되고 전문화된 화랑들의 출현과 무엇보다도 젊은 작가들의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다시 활기를 되찾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