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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10 | [특집]
창작의 땀을 기억하는 시대의 증언자
문화저널(2005-01-05 14:56:14)
먹고사는 일에 매달려온 성장과 개발의 시대에 문화예술은 돈 있는 자들의 '사치'쯤으로 밀려나 있었고, 예술가들은 가난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아 왔다. 그래도 창작과 예술에 대한 의지와 열정은 오늘까지 치열하게 살아남았다. 창작인의 결실이 대중과 만나는 자리, 문화예술이 지닌 질긴 생명력을 오롯이 지켜보았던 문화예술공간은 가난했지만 변화와 성장을 통해 예술의 깊이와 열정을 키워가던 창작인들의 소중한 꿈의 터전이 되어왔다. 문화예술이 경쟁력을 갖추고 새로운 산업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문화예술에 대한 향유 욕구가 점차 높아지면서 문화예술공간도 시대의 파고를 넘으며 함께 성장하고 변화했다. 불과 10년전만 해도 문화예술공간의 확보가 예향 전북의 자존심이라며 척박한 지역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현재 전북이 확보하고 있는 문화공간을 둘러보자면, 실로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창작인과 향유자가 있어 존재했던 문화예술공간. 지금은 전국 어느 극장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한국소리문화의전당과 한옥마을에 들어선 전통문화센터, 각 동에 위치한 문화의집 등 과거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문화예술 환경을 갖추게 됐지만, 문화예술인들은 가난하고 열악했던 시절을 함께 한 문화공간들이 있었기에 지역문화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문화예술인들의 가슴 한켠에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는 문화예술공간, 그 아슴한 기억은 다방으로 거슬러올라간다. 60년대와 70년대를 풍미하던 문화공간은 흥미롭게도 다방이었다. 화가들은 다방 벽면을 이용해 그림을 전시하고 다방을 이용하던 손님들이 전람회의 관람객들이었다. 지금의 갤러리 기능을 수행하던 곳이었지만, 제대로 된 조명이나 걸개 장치도 없었다. 물론 전문적인 전시기획자도 없었고 그림 카달로그를 구경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당시 그림하고 연극한다는 이른바 지역 '한량'들의 사랑방 역할은 물론, 발표무대에 대한 갈증을 충실히 해소해주던 장소였다. 70년대에 설다방과 금난다방 명다방 옥다방 등이 전주 문화예술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문화공간이었는데, 지금의 문화공간처럼 다방에도 엄연한 '격'이 존재했다. 규모가 좀 더 크고, 유명 인사들이 드나들던 다방은 어김없이 원로나 선배 예술인들, 실력파 예술인들의 차지였다. 70년대 후반 도청 앞 사리문다방을 인수해 화랑으로 운영했던 서양화가 유휴열씨는 "어떤 인사들이 드나드는지, 얼마나 실력 있는 문화예술인이 이용하는지에 따라 공간운영자(?)인 다방 마담들의 콧대도 높낮이가 달라졌다"고 회고한다. 다방 전성시대는 그림 유통이 투명하지 못하게 진행되고 그로 인한 폐해가 발생하면서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권력계층을 등에 업고 지역 유지들을 다방으로 불러내 공공연하게 작품을 사도록 종용하는 사례들이 늘어나면서, 관청이 이를 막기 위해 '위생검사'를 빌미로 영업정지 결정을 내리면서 '다방' 문화공간 시대도 서서히 막을 내렸다. 다방에 이어 전시공간은 표구사가 상업화랑의 역할을 대신했고, 사설 화랑들이 하나둘 문을 열고 또 문을 닫으며 명멸했다. 거듭되는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설 화랑들이 차례로 문을 닫은 상황에서도 10년 넘게 꿋꿋이 그 질긴 생명력을 이어온 유일한 공간이 지금의 얼화랑이다. 1987년 문을 열고 지역에서 유일하게 특화된 미술관으로 5년여동안 민중미술의 대중화와 활기를 이끌어낸 온다라미술관 역시 시대를 읽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문화공간이었다. 전통적으로 연극 역사가 탄탄한 전북지역에서 과거 무대공연의 대부분은 연극이었고, 무용과 독주 무대 등이 그 뒤를 이었다. 60년대와 70년대는 시민문화관과 다방, 영화상영을 목적으로 한 극장 등이 주된 공연 무대였다. 조명이나 무대장치, 음향과 방음시설은 고사하고, 계단식 객석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게 원로 문화예술인들의 설명이다. 지금은 기술의 발전으로 화려한 무대 매커니즘이 공연 형태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시도를 가능케 하고 있지만, 60~70년대에는 객석과 무대가 나뉘어진 기본적인 무대 공간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는 우진문화공간과 예루소극장, 아사달 등 기업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문화공간들이 무대 공연자들의 발표무대로 문화예술인들의 갈증을 풀어주었다. 지금은 대부분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시설이 노후되거나 재정난 등으로 과거의 기능을 상실한채 문을 닫았다. 무대공연 공간 가운데 지난 1990년 건립된 창작소극장의 존재는 공연자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무대로 기억되고 있다. 지난 1997년 화재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소극장 무대로는 10여년이 넘는 시간동안 사랑받아 온 문화공간이다. 전주시 효자동에 위치한 바리톤소극장 역시 지난해 운영 10년을 맞아 순수 클래식 공연을 위한 무대공간으로 짧지 않은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1982년 전라북도에 의해 전주 경원동에 위치한 지금의 전북예술회관이 건립되자, 전시와 공연이 이곳으로 봇물처럼 쏟아지면서 90년대 들어서는 전시일수를 최대 5일로 제한하는 등의 자구책을 마련해야 할 만큼 예술인들의 폭발적인 수요가 이어진다. 이후 전북예술회관이 급증하는 문화 수요를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90년대 후반 들어 새로운 문화공간 건립에 대한 본격적인 공론화가 이뤄진다. 그러나 재정과 부지확보 등의 문제로 수년을 공전하다, 지난 2001년 9월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마침내 민간위탁이라는 새로운 운영방식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문화예술공간은 창작의 산실이자 건강한 땀의 결정체를 지켜보았던 또 다른 시대의 증인자다. 문화예술에 대한 향유 욕구와 의식 변화, 창작인의 새로운 도전과 시도를 타고 문화예술공간도 다양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왔다. 그 속에서 창작인들이 더불어 성장하고 세대교체가 이뤄져 왔다. 사람들의 의식과 내면을 표출하는 문화예술, 세분화되고 다양해져가는 사람들의 욕구와 문화예술 장르의 전문화 등에 따라 문화예술공간은 앞으로도 끊임없는 변신과 차별화가 진행될 것이다. 전시와 공연이 봇물을 이루는 10월, 문화예술공간이 가장 활기를 띠는 시기다. 창작인과 함께 호흡해 온 문화예술공간, 어떤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는 지 이번 특집에서 그 발자취를 더듬고 현재의 위치를 확인해 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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