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0 | [문화칼럼]
지역에서 문화기획자로 산다는 것
윤성진(2005-01-05 14:28:11)
'문화기획'을 한다는 것 그것도 '지역'에서 문화기획자로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런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 앞으로의 진로와 과제에 대한 고민은 대부분의 지역 문화기획자의 공통된 문제의식일 것이다.
경기불황으로인한 소비위축은 공연·전시 등 문화예술 시장에도 그 위력을 지속적으로 발휘하고 있다. 대형 수입공연물들과 검증받은 기존작품의 재공연, 일정규모 이상의 마케팅비를 투자한 작품이 아니면 경기불황의 위세앞에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잠정적 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문화시장 전체가 위축되고 기형적 성장 양태를 보이고 있는 요즘, 지역의 축제, 공연, 전시 등 문화기획자들의 고민은 어느때보다 많다. 모든 문화가 서울로 모이고 자본이 서울로 집중하는 상황에서 과연 지역에 남아서 문화기획을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고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글로벌시대에 전 세계가 단일 시장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한 나라의 지역시장에만 안주하고 있어 우물안 개구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지역 문화기획자라 함은 서울이 아닌 지역에서 최소 시, 도를 활동범위로 축제, 공연, 극장경영, 전시, 영화 및 음반 기획등의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스스로를 기획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문화인력 전반을 지칭한다. 단, 문화행사를 '돈이 되는가 안되는가?'하는 측면에서만 보는 프로모터(흥행사)들은 문화기획자 범주에서 제외하는 것이 좋겠다. 그들의 관심은 '문화를 어떻게 돈되는 상품으로 만들것인가?' 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되는 문화'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문화산업분야에서 시장을 형성시키는 근간은 창작과 순수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보다 중요한 근간은 창작을 지탱하고 재생산해낼 수 있는 시스템이라고 볼 수있다. 문화시장의 기형적 성장과 시스템부재가 만들어내고 있는 시장의 왜곡된 구조가 고착되어 문화기획자의 기획력이 생산적으로 반영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내기 전에 스스로 생존을 위한 전략을 구상해야 하며, 문화기획자들 간의 협력을 통한 방향전환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생존을 위한 긴장된 위기의식을 갖고 지역 문화를 살아있는 문화로 만들 수 있는 훌륭한 문화기획자가 되기위해서는 첫째, 축제만능주의 사고를 버려야 한다. '축제'가 문화기획과 문화이벤트의 중심적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축제는 결국 참여자의 문화적 역량이 성숙했을때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오랜 노력의 종합적 결과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무조건 크게 벌려보자는 식의 무책임한 발상과 축제가 단순한 이벤트들의 복합체로 이해되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축제를 자연스럽게 발현되도록 만드는 문화저력과 지역 문화네트워크 구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장기적 관점으로 관객을 개발하고 지역 마케팅 네트워크를 형성하라. 10년을 내다보고 기획을 한다면 오늘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을 단골 고객으로 만들어야 한다. 불특정 다수의 관객이 아니라 몇십명씩이라도 하나의 identity를 갖고 묶여진 관객군을 조금씩 늘려가면서 마케팅 네트워크를 형성해서 1명의 대표자가 100명의 관객들과 함께 올 수 있는 관객조직을 개발하고 관리해야 한다. 이들 조직이 공고해 질수록 흔들리지 않는 후원세력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한다.
셋째, 최소 10년을 문화기획 분야에 투자할 생각이 아니면 시작도 하지말아야 한다. 다소 주제넘은 제안일지 모르지만, 한 개인이 지역에서 활동경력이 10년은 되어야 지역의 문화적 정서, 문화적 기반에 대한 이해, 지역내의 인지도 확보와 네트워크 형성 등 모든 필요충분 조건들이 안정 궤도에 올라간다. 그 이후에는 보다 적극적이고 규모있는 행사들을 기획하고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10년을 버텨온 기획자들이 살아남아 있어야 후배들도 미래를 보고 자신을 걸 수 있지 않겠는가?
넷째, 열린공간 열린만남을 통해 내 지역만의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라. 서울에서 장사 잘된 공연, 전시 등을 가져다 소개하는 것은 쉬운일이다. 지역만의 특성을 반영한 문화콘텐츠를 장기적 안목으로 개발하고 상품화시키는 전략이 필요하다. 콘텐츠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아주 작은 공연,전시라도 소홀히 하지말고 열린 무대를 많이 만들어 관객들과 자주 만나서 콘텐츠를 단련시키는 기획이 필요하다.
다섯째,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인력을 키우라. 지역의 우수한 인재들이 그 빛을 지속시키지 못하는 것은 혼자서 다 하다가 힘이 부칠때쯤 그걸 대신할 후진을 만들어 놓지 못하고 퇴진하기 때문일 때가 많다. 모든 일을 혼자서 다 하려하지 말고 처음부터 자신을 대신할 후임자를 양성하자.
여섯째, 서울의 콘텐츠 공급업체와 긴밀히 연계하라. 지역 문화기획자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가 서울과 얼마나 긴밀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서울에 전적으로 의존할 필요는 없지만, 양질의 문화콘텐츠에 대한 정보를 빨리 파악하고 지역에 소개하여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을 자극하고 관객의 안목을 높이는 역할을 발빠르게 할 수 있는 기획자가 되어야 한다.
일곱째, 지역적 사고에서 중심적 사고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이제 지역이 중심이 되고 있고, 변방이 문화의 발산지가 되는 전환의 시대이다. 관점을 달리하면 서울도 중심이 아닌 지역이다. 내가 서있는 이곳이 시작이고 중심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오리지날리티를 형성할 수 있도록 과감하게 도전하고 자신감있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여덟째, 프로모터나 마케터보다는 프로그래머나 콘텐츠 개발자를 지향하라. 이 말은 이미 국내 시장이 단일 공연시장으로 형성되어있고, 아시아권을 넘어서 전 세계 공연시장으로 공연시장이 글로벌화하는 상황에서 지역시장만을 보고 공연유통과 마케팅을 전담하는 문화기획자는 그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오히려, 서울의 대규모 기획사와의 파트너쉽만 유지하면서 지역 문화콘텐츠 개발과 지역 문화마케팅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 즉 지역과 밀착된, 지역문화콘텐츠와 연관된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성장가능성이 크다. 결국 앞으로는 콘텐츠가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아홉째, 순수와 대중, 상업적 행사와 비영리 행사의 구분에 매몰되지 말라. 능력없는 기획자는 순수와 비영리의 명분으로 가려진 보호막 속에 자신을 가두고 문화콘텐츠의 상품화 가능성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의 만족'에 빠져서 '순수'만을 부르짖는다. 필자도 창작뮤지컬과 창작아동극 등 창작물과 순수공연예술 중심으로 작업을 해왔지만, 오히려, '순수'에의 추구는 '창작자들의 언어'이어야지 '기획자들의 언어'여서는 안된다. 창작자의 '순수'와 '진실'과 '고결'한 예술품이 어떻게 대중들과 만나고 상품화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창작자에게 요구해야 하는 사람이 기획자다.
마지막으로, 문화기획자들의 고급한 네트워크를 만들어가라. 창작자들처럼 기획자들도 선의의 경쟁관계에 있다. 하지만, 창작자와는 달리 기획자들의 생산성은 협력과 연대에서 더 극대화할 수 있다. 창작이 고독한 작업이라면, 기획은 조화의 마술이기 때문이다. 네트워크를 통해 문화기획은 '업자'들의 '장사'가 아니라 '업계'의 '거대한 흐름에 동참하는 것'임을 깨닫게 될 수 있다.
'문화'는 공기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온몸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문화에도 품질이 있고 그 품질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다만, 고급한 문화를 체험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일상적 삶을 관통하는 문화가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문화기획자'의 역할은 고급한 '문화'를 체험케 하여 일상을 깨닫게 하고 고급한 '문화'를 찾고 즐기게 만들며, 종국에는 일상적 삶을 고급한 문화적 삶으로 바꾸어 내는 것이다. 고급한 문화속에서 살아가느냐 저급한 문화속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이제는 문화생산자보다 문화기획자의 손에 더 많이 달려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있다.
지역을 살 만한 곳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는 사람이 바로 문화기획자인 것이다.
윤성진 | 성균관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공연예술학과 과정을 수료했다. 2002 제4회 광주비엔날레 축제행사 프로그래머, 한겨레신문사 문화센터 문화기획학교 강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연예술기획 '이일공' 대표로 있으며, 지하철예술무대 등 참신한 공연기획으로 주목받고 있는 젊은 문화기획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