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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 | [서평]
"노래가 된 사나이,조태일"
조진태 5ㆍ18기념재단 사무처장(2004-12-09 16:20:23)
조태일 시인의 시선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의 발문에 ‘우리 시가 침체의 늪을 탈출하는 데 그의 후기 시는 한 몫 단단히 할 것’이라고 시인 신경림은 썼다. 이 진술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읽힌다. 요즈음 우리 시단이 침체에 빠졌다는 위기감의 실토와 시문학을 독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자괴적인 토로가 그것이다. 그런데 가히 양자는 서로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신경림 시인의 속내도 거기에 닿아있음을 곧장 알 수 있다. 독자들의 고심을 예측이라도 하듯, 시 읽는 재미와 함께 독자가 접근하기에 쉬운 방식으로 시선집을 엮었다는 답을 신경림 시인은 제시해두고 있다. 그만큼 ‘나는 노래가 되었다’에 대한 신경림 시인의 애착은 남달라 보인다. 그럴밖에. 수십 년을 각별하게 지낸 문우이자 문학운동의 동지였던 시인 조태일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신경림 시인은 그의 시를 전체적으로 통독하며 그의 시와 작금의 시단의 현실을 반추해보았을 터, 이 시선집은 그런 곡절을 안고 태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신경림 시인의 발문과 조태일 시인의 시선집이 더욱 각별하게 보이는 이유가 오히려 다른 데에 있지 않는가 싶다. 2004년 11월 18일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1)가 창립된 지 꼭 30주년이 되는 날이다. 물론, 조태일 시인의 시선집은 2004년 9월에 세상에 나왔다. 세상에 나오기 한 참 전에 발문 역시 쓰여 졌을 것이다. 시간적 상관이 훨씬 멀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글을 쓰는 필자에게 아무래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와 조태일, 그리고 신경림의 실루엣들이 서로 엉기며 함께 공명하고 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실 창립당시 선후배 사이로 실무 역할을 도맡아했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인 고은이 대표간사이고 신경림 시인은 염무웅, 박태순 등과 함께 간사 일을 맡고 있었는데,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창제인쇄소를 경영하던 조태일 시인은 표면상으로는 이름을 걸지 않았지만 자실의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문학운동을 온몸으로 전개하였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자실 3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는 이즈음, 시인 조태일의 시선집과 신경림 시인의 발문은 그 행사와의 상관성 유무를 떠나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것이 어찌할 수 없는 나의 소회이다. 시선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에는 조태일 시인의 35년 시 역정이 굽이굽이 빠짐없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아침 선박’으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을 때부터 근육질의 육성으로 한반도의 남쪽을 내달렸던 ‘국토’를 아우르며, 마침내는 모성에 자신의 영혼을 갖다 대며 이슬과 풀씨와 더불어 ‘혼자 타오르고 있었네’ 까지 순연하게 시인의 궤적을 꿰고 있는 것을 단숨에 다 읽어갈 수가 있다. 그만큼 조태일 시인의 여덟 권 시집을 잘 졸가리하여 한권의 아름드리나무 하나로 세워놓고 있는 것이다. 오래되었으면서도 싱싱한, 이역설적인 느낌의 시선집과 그 발문을 읽어가면서, 문득 나는 ‘석탄 - 국토 15’에 눈길이 머물렀다. 나의 문학청년시절의 어렴풋한 기억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1983년께, 조태일 시인이 운영하던 서울의 시인사를 찾아 삐꺽거리는 마루 장판을 걸어 석유난로를 앞에 두고 시인을 첫 대면하였을 때 문득 이 시를 떠올렸던 기억이 있다. 시인의 덩치는 이미 나를 압도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나에게 ‘그렇게 덩치가 크면서 무슨 시를 쓰려하느냐’며 어깨를 툭 치던 모습의 그림자가, 문학의 열정과 실천행동에 골몰하던 나의 옛 모습과 함께 스치듯 떠올랐던 것이다. 그 때 국토의 시인은 문학하는 후배들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강인한 어법으로 하나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가히 범접할 수 없는 시인의 육성은 그 뒤 가끔 자실의 농성장 등에서나 접할 수 있었고, 80년대 조태일 시인과 이 후학의 인연은 거기까지였다. 그리고 그 뒤 인연의 질김으로 얘기할라치면, 시인이 광주대학교에서 후학을 지도하다가 세상을 뜨신 뒤, 광주전남 민족문학작가회의 사무국장을 맡아 시인의 추모제를 지낸 것과, 곡성 태안사 자락의 문학관 건립의 한 귀퉁이 일을 맡아 시인의 자락을 매만졌다는 것을 얘기할 수도 있겠다. 개인의 인연이 별반 특별할 것 없어도 시선집 곳곳에서는 조태일 시인의 삶이 낱낱이 읽힌다. 90년대 들어 시인의 목소리에는 촉촉한 물기가 잔뜩 묻어있음을 알 수 있겠다. 변화한 세상의 삶이 버겁게 그를 짓누르고 있음도 밟힌다. 지나온 역사와 함께 시인이 걷고 있는 도시의 끄트머리이자 농촌의 시작인 곳에 눈길이 자꾸 가 멎는 것도 가슴 저리게 다가온다. 그리고는 곧장 90년대 후반 들어 본래의 순진무구한 시심으로 자연과 자연의 모성, 그리고 자신의 고향 언저리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을 환하게 들여다 볼 수가 있다. 이즈음 그의 시는 새삼스럽게 나의 눈물샘을 많이 자극한다. 어쩌랴! 어머니라는 존재가 시인에게는 항상 돌아가 가슴기댈 하염없는 영원과 같은 것임을. ‘에미도 모르는 소리 끄적여서/어디다 쓰느냐 돈 나온다더냐/시 쓰는 것 겨우겨우 꾸짖으시(시 어머니)’던 어머니는 어슷비슷한 나의 어머니였던 까닭이었다. 이승의/진달래꽃/한묶음 꺽어서/저승 앞에 놓았다. // 어머님/편안하시죠?/오냐, 오냐,/편안타, 편안타.(어머니를 찾아서 전문).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여. 곡성 동리산 태안사 입구에는 조태일 시문학관이 단정하게 자리하고 시인의 육성을 가다듬고 있다. 이제 곧 눈이 내려 동리산자락을 하얗게 덮겠지만 신경림 시인의 발문과 덩달아서, 이제 시인 조태일은 자신이 노래가 된 것처럼 ‘노을’로 환하게 타오를 것이다. 저 노을 좀 봐./저노을 좀 봐.//사람들은 누구나/해질녘이면 노을 한 폭씩/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에서/서성거린다.//쌀쌀한 바람 속에서 싸리나무도/노을 한 폭씩 머리에 이고/흔들거린다.//저 노을 좀 봐./저 노을 좀 봐.//누가 서녘 하늘에 불을 붙였나./그래도 이승이 그리워/저승 가다가 불을 지폈냐.//이것 좀 봐./이것 좀 봐.//내 가슴 서편 쪽에도/불이 붙었다.(노을 전문) 1) 1974년 11월 18일 박정희의 유신헌법 선포에 맞서 민족현실에 문학인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을 밝히며 구속된 김지하 시인과 지식인 종교인 학생의 석방과 함께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의 자유는 제한될 수 없음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문학인 101인 선언’으로 밝히고 출범한 문학단체였다. 이 단체는 1987년까지 우리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의 생존권, 민족의 통일을 위해 작품과 행동으로 발언해왔으며 90년대 들어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진용을 재정비하여 활동하고 있다. 자실의 역사에 대해서는 ‘내일을 여는 작가’에 연재되었던 박태순의 자유실천협의회문예운동사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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