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 | [문화저널]
장금도의 민살풀이와 저작권
남형두 변호사(2004-12-09 16:18:32)
여느 해보다 유난히 길고 맑은 가을의 한복판에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에서 올려진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은 혼자만 보고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공연이었다. 그 중에서도 40년간 자신의 이름과 춤을 숨기고 살아온 명인 장금도의 민살풀이춤은 단연 압권이었다. 지금도 무대 옷을 세탁소에 맡겨두고, 공연 있는 날에 잠시 들러 갈아입고 나선다는 장 명인. 어떤 평론가는 그의 춤을 “돌아설 듯 멈추고 멈출 듯 돌아서는 소매 끝에 무수히 일어서는 여백들”이라고 표현했다. 끊어질 듯 하면서 끊어지지 않는 그의 춤에는 필시 거문고연주와 같은 여백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음(無音)을 음악의 최고 경지라 하여 거문고의 음과 음 사이 여백(무음) 때문에 거문고를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 한다면, 동작으로 이루어진 춤의 사위 사위 중간에 무동작의 여백이 느껴지는 장 명인의 민살풀이는 백무지장(百舞之丈)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해 보았다.
만약, 이러한 장 명인의 민살풀이를 그의 허락없이 다른 사람이 공연장에서 추었다고 치자. 장 명인은 이에 대해 저작권침해를 주장할 수 있는가? 저작권법에 의하면, 무용은 저작물의 한 형태로 예시되어 있으며, 연기의 형(型)으로서 이미 구성되어 있는 안무(choreography)는 무용저작물로 보호되고 있다. 한편, 장 명인의 춤은 양식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약 15분 정도의 시간 동안에 자신의 흥과 한을 그대로 표현하는 일종의 즉흥무에 가깝다. 이와 같이 무보(舞譜)에 일정양식으로 기록할 수 없는 즉흥무임에도 저작권의 보호대상이 될 수 있는가?
우리 저작권법은 미국의 그것과 달리 고정화(fixation)를 그 요건으로 하고 있지 아니하므로, 즉흥무용도 저작물로 보호된다. 미국 저작권법에서는 저작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유형의 표현매체에 고정화(fixed in tangible medium of expression)’될 것이 요구된다. 따라서, 원고지에 고정되지 아니한 즉흥시, 즉흥강연, 악보에 고정되지 아니한 즉흥곡이나 즉흥연주, 나아가 장 명인의 민살풀이춤과 같이 무보에 고정되지
아니한 즉흥무 등은 미국법상저작물로 인정될 수 없지만, 우리 저작권법에서는, ‘소리’ 또는 ‘동작’이라는 표현매체에 의하여 외부적으로 표현되었으므로 저작물로 보호된다.
어떤 점에서는 미국처럼 고정화라는 까다로운 요건을 추가하되, 보호는 철저히 해주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겠다. 우리의 경우 저작권법의 관점에서 보면 저작물성이 쉽게 인정되는 반면, 권리로서 독점하려 할 경우 심한 반발에 부닥칠 수 있어 결과적으로 저작권보호에 소홀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 즉흥음악인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만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추임새를 넣는 관객의 참여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으므로, 판소리라는 음악저작물의 창작에는 이용자이자 소비자인 관객의 몫도 있는 셈이다. 소리를 악보와 음반에 가두어 두는 것을 죽은 음악(예술)이라고 생각해서인지, 과거 명창 중에는 자신의 소리를 녹음해 놓지 아니하여 오래되지 않은 과거임에도 전설로만 남아있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래저래 우리는 저작권에 관한 의식이 강할래야 강할 수 없는 전통예술형식과 의식구조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거의 반세기 동안 세탁소 한 구석에 먼지가 켜켜이 쌓여있던 장금도의 한스러운 춤을 소재로, 재미없는 법 이야기를 하는 필자 자신이 한스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