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서른 즈림의 不生<비포 선셋>
신귀백(2004-12-09 15:36:05)
<비포 선셋>, 엔딩이 허망한 영화. 그러나 오래 남을 영화. 상대에 대한 인정감과 존중이 넘쳐 젊은것들의 영화라고 내칠 수 없었다. 따뜻한 대화들로 가득한 화면에 나는 서른 살처럼 뿌듯했다.
배낭여행 중 새벽이 오기 전(Before Sunrise) 기차에서 만난 짧은 사랑으로 헤어진 스물 한 살의 청년들이 다시 만나기로 했던 6개월 후의 비엔나는 비어있었다. 그리고 9년. 그 부재의 더깨는 어떤 것이었을까. 부재의 세월은 주름살만 던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융기를 컨트롤 할 수 있는 성숙을 주는 것. 베스트 셀러 작가가 된 제시(에단 호크)와 환경운동가로 성숙한 셀린느(줄리 델피)는 파리의 어느 책방에서 만난다. 제시는 비행기 시간을 맞추어 떠나야 하기에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두 시간. 그들은 걷는다. 실시간 기법의 다큐처럼 리얼타임으로 진행되기에 배우들은 단벌 옷으로 때운다. 그저 걷고 이야기할 뿐인 이 건방진 영화는 배경이 되는 도시의 아름다움에 기대지도 않는다. 영화 속 파리는 안개에 젖지도 눈과 비도 내리지 않고. 그들은 골목을 지나 차를 마신 후 세느강을 타고 부재를 거슬러 올라간다.
파리로 팬사인회에 올만큼 성공한 소설가지만 그는 결혼에 지쳐있었다. 감정이 통하지 않는 착한 아내(에단 호크의 아내 우마 서먼은 어떨까?)가 있으나 이혼의 모험을 감행하고 싶지는 않은, 마르크스주의가 부재한 그렇다고 체제순응적이지도 않은 이 남자는 열정보다는 우수로 가득 찬 사람. 동반자는 있지만 구속하거나 도덕에 얽매이지 않는,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꿈을 가진 셀린느. 그들은 일의 성취를 이야기 한 후 부재의 질량을 탐색한다. 이들은 오직 그와 그녀만을 위해 오래 참고 견디지는 않았기에 과거를 돌아보는 화면 바깥 관객을 결코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다(아!「북해의 별」이 보여준 그 지독한 기다림이라니). 지나간 사랑에 대한 헌신도 없지만 원망이나 복수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유순하게 받아들이기에 그들은 자유롭다.
미국 시트콤 <섹스 앤드 더 시티>가 재미있는 이유는 사랑을 만들기 위해 한 자락 깔고 또 받아주는 맛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럽식 미국영화는 침묵으로 상대를 탐색하는 잽이 없다. 다혈질 세린느의 화법은 수시로 예각의 감정을 토로하지만 둘 다 성내지 아니하고 둥근 온유에 기댄다. 왜? 서로의 가치관과 삶의 무늬를 존중하기에. 싱글이라고 화려한 판타지를 보여주지도 않거니와 더블의 누추함도 점만 찍고 넘어간다. 또 상대에게 구태여 섹스를 요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꼭 고환이나 난소를 구태여 숨기지도 않는(음, 디드로의 표현을 빌리자면)다. 자신이 들고 있는 성적 잣대에 대해 음란하지도 냉정하지도 않은 욕망을 이야기 할 뿐. 그래서? 어쩌겠냐는, 관객의 조바심에 감독은 무관심하다. 그러니 이 친구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냉정한 감독이다. 캐릭터에 일부러 동기를 부여하지도 않고 플롯에 장식을 늘어놓지 않기에 특별한 하강이 없어 결말은 <비포 선라이즈>처럼 열려 있다. 그래서 그 끝을 여운으로 본 사람은 행복하고 <화양연화>식의 봉인된 결말이라도 기대한 사람에게는 허전함을 준다.
언제고 절실하지 않은 나이가 있으랴만, 서른살!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경제학자가『공산당 선언』을 쓴 나이나 극장에서 영화처럼 간 기형도의 이야기도 서른 즈음의 일들이다. 그 때, 취향을 강요해 헤어진 사람이 있고 헤어진다고 말도 못하고 보낸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부재를 사유할 시간도 없이 서른의 날들은 후딱 지나갔다(이런이런!). 살아보니 서른 이후에도 살아지더라. 통장이 생기고 얼마지 않아 차가 그리고 집도 아들도 생겼다. 阿Q처럼 걸어오면서 이제는 어영부영 불혹도 넘겼지만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들으면 아직도 가슴이 더워진다.
꿈을 꾼다. 오십이 넘어 빛으로 가득한 바다를 보여준 마르그리뜨 뒤라스나 김훈처럼, 팬사인회 끝에 그 시절의 줄리 델피가 잠자리처럼 책방으로 날아온다면? 함께 혜화동이든 전동이든 걸을 것이다. 걷다보면 서른 전후의 부재 속으로도 걸어가게 되리라. 또 그녀가 불러주는 노래를 듣는 방이 없다고 믿는다면, 앞으로 맞게 될 엔딩은 얼마나 지루하고 허망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