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 | [특집]
동북아 미술중심 미술관으로 비상하라
최열 미술평론가(2004-12-09 15:34:28)
높은 관심을 모아 들뜬 분위기인 듯 하여 나 또한 전북도립미술관의 출범을 행복하게 여기고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이만한 열매를 얻기가 쉽지 않음을 알고 있는 터이므로 기쁨이 더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지역 미술인들의 악전고투나 공공미술관 하나 없어 미술문화 향수권을 박탈당했던 도민들의 공허함에 비추어 미술관 출범은 지나치게 늦은 것이다.
근대시기로 접어들었을 무렵 이미 설립했어야 할 공공미술관이 이제야 생겼으므로 해나가야 할 과제가 산처럼 쌓였음은 누구나 공감하고 있을 것이다. 과제 속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미술관이 역사적이고 예술적인 가치를 지닌 작품을 포함한 자료를 수장하고 지역주민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교육을 수행하는 곳이라면 과제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다.
첫째로는 소장 작품을 최대한 확보해 나가야하며, 둘째로는 의미 있는 기획 전람회를 꾸준히 개최할 것. 셋째로는 청소년과 성인 교육프로그램 개발이라 할 것이다. 매우 고전적인 주문이라 할 것이지만 이러한 과제를 충족시키는 일이야말로 신생 미술관이 주력해야 할 전략임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소장 작품이 없는 미술관은 단순 전시장소 또는 건축 공간일 뿐이다. 설령 소장품이 제법 있다고 해도 가치
없는 자료들로 채워져 있다면 미술관은 존재 의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소장품의 가치는 관광방문지 선정의 일차 기준이 될 만큼 중요한 것이며, 따라서 차별화의 전략 또한 여기서 생성되는 것이다. 미술관의 명성과 권위도 여기서 좌우되는 것이므로 나는 전북도립미술관의 미래를 바로 여기에서 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일한 국립현대미술관조차 작품 구입예산이 최근 몇 해 동안에야 증가했던 사례를 볼 때 열악한 지자체의 처지에선 꿈꾸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 과제는 장기 사업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뛰어난 기획 전시회 수행을 당면한 주요 전략과제로 설정할 수밖에 없다. 이 사업은 이미 개관기념전에서 상당한 역량을 선보였으므로 희망 섞인 전망을 해 본다.
다만 쓸데없는 염려라 할지 모르나 지역미술인의 요구를 지역주민의 요구로 착각하는 잘못을 크게 경계해야 한다는 주문을 하고자 한다. 따라서 지역미술의 성장기지로 기능하는 역할을 일부 배려하는 가운데 한중일을 아우르는 국제화 구상을 마련하고 동북아시아 미술 중심지대로 성장할 수 있는 전략을 세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심찬 구상도 인력과 예산 없이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에 먼저 수행해 나갈 사업은 가능한 범위에서 최고수준의 기획전을 지역주민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일년에 한두 차례 장르를 넘나드는 수준의 블록버스터를 마련하여 도민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한편,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전국 공공미술관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지혜를 발휘할 일이다. 특히 교육프로그램 개발과 수행은 미술관 안에서만이 아니라 소규모 이동 순회와 같은 개방형태로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인력과 예산의 한계가 있겠지만 각 군 단위 문화담당자와의 연계를 염두에 두고 개발해 나간다면 돌파구가 열릴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업은 전북 지역 미술인과 관, 민 전체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며 설득 과정이기도 하다. 한편 동북아시아 미술 중심전략을 마련하고 도민의 지지를 획득해 나가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 나는 이러한 구상을 전북지역 특성화 모델과 그 전략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과학도시로서 대전의 경우 과학과 미술의 결합을 추진하고 있으며 예향으로서 광주는 국제규모의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미술중심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전북은 무진장고원과 김제평야 그리고 중국으로 이어진 서해안 지역이다. 인접한 중국 상해를 아울러 하나의 공동권역을 이룩해 나갈 수 있는 지역발전계획의 일환으로 동북아시아 미술중심 실현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동북아시아 중심 미술관은 단지 미술관 자체의 기획과 실천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다. 도민의 지지와 지자체의 강력한 의지, 미술관 조직의 유능함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며 지역경제발전 프로그램과 조화로운 추진이 이뤄져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희망은 헛된 꿈이 아니다. 전략을 마련하고 장단기 계획의 점진적 수행을 꾀해나감으로써 미래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첫 과제인 작품 수장 전략으로 되돌아가야 할 듯 하다. 미술관의 가치를 결정하는 소장자료의 구성이야말로 미래를 향한 가장 튼실한 초석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하여 나는 한국미술협회 전라북도지회가 1997년에 펴낸 <<전북미술근대사>>를 펼쳐 보았다. 19세기말 이후 이정직, 이경립, 조주승, 최석환, 채용신 그리고 김복진, 김희순, 박병수, 배석린, 진환, 박래현으로 이어지는 근대 화가들이 눈길을 끈다. 또한 일제강점기 때의 동광미술연구소, 해방직후 전북미술전람회와 녹광회, 신상회, 녹묵회로 이어지는 단체활동 또한 상당하다. 게다가 이 지역과 연고를 지녔던 황용하, 변관식, 이용우, 이응노, 오지호의 지역에서의 활동내역에 관한 관심도 일어난다. 이들이야말로 전북도립미술관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대상이다.
도립미술관은 이들에 관한 자료와 작품 조사, 수집에 당장 나서야 한다. 초창기 미술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차대한 사명인 탓이다. 다음 단계로는 20세기 후반기에 이뤄진 미술활동의 풍부함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 수집이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조사, 수집이 미술관의 노력만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역 미술계의 적극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인데 어딘가 그 많은 자료,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거나 소재를 파악하고 있는 이들의 의지가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는 홀로 소유하는 게 아니다. 혼자서는 성장하지도 평가받을 수도 없다. 공유해야 하는 게 문화고 그럴 때만이 성대한 풍요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전북지역 근현대 미술을 향유하고자 할 때나 연구하려 할 때 바로 그 미술관을 찾을 수 있도록 가꾸어야 할 것이고 이를 기초로 하여 지역미술의 전당으로 자리매김할 때 동북아시아 미술중심의 미래 또한 꿈이 아닌 가까운 미래의 현실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21세기형 미술관의 요란한 구호, 현역 미술인들의 사랑방, 순간순간 흘러가는 블록버스터의 현장과 같은 산만함 따위를 희망하는 게 아니다. 이러한 구호나 행사는 다른 문화공간에서도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 첫 발걸음을 내디딘 미술관이 참으로 전북지역 미술문화를 대표하는 가치 있고 권위 있는 중후한 기관으로 우뚝 설 수 있기를 소망하며 동북아시아 어느 나라 사람이건 모두 한번쯤 가고 싶어 하는 바로 그 꿈의 중심으로 비상하기를 뜨겁게 열망한다.
최 열 | 1956년 전북 무주에서 태어나 조선대학교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을 졸업했다. 1999년에 제2회 한국미술저작상을 수상했으며, 1998년부터 ‘가나아트’ 편집장과 가나아트센터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근대사회미술론』, 『한국현대미술운동사』, 『민족미술의 이론과 실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