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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 | [특집]
즐거운 상상이 실현되는 공간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사 교수(2004-12-09 15:26:49)
전주 시내에서 자영업을 하는 K씨는 요즘 아침마다 바빠졌다. 가게 문을 오후에 열어 오전 시간은 좀 여유가 있었는데 이 시간에 전북도립미술관의 미술실기 강좌를 듣기 시작한 것이다. 드로잉을 배우는데 현직 작가들이 직접 지도해주는 시간도 재미있고, 같은 취미로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면서 생활이 풍요로워진 것이다. 학생들의 실력이 늘면 도립미술관 안뜰에 조그마한 전시도 열어 준다니 열심히 해볼 셈이다. 40대 중반의 회사원 L씨는 요즘 삶에 활력을 느끼고 있다. 주말 마다 모악산 산행을 즐겼는데 최근 새로 생긴 도립미술관에 한 번 두 번 들르다보니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반이었던 자신의 취미를 새삼 제대로 발전시킬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골방 하나를 화실로 꾸밀 생각도 해보고 내년에 도립미술관에 열릴 이론 교양강좌도 다닐 계획을 세우다 보니, 회사생활이며 집안일에 활기를 더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부 P씨도 전북도립미술관 덕에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일주일에 두 번 열리는 어린이 무료 미술교실에 큰 애를 데려다 주고, 세 살 밖이 둘째와 전시실과 말끔히 마련된 놀이방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예술을 통한 정서 함양의 중요성을 부쩍 느끼는 것이다. 애들이 좀 크면 미술관자원봉사에 참여할 계획도 벌써부터 하고 있다. 전북도립미술관이 생겨 삶에 변화가 생긴 사람으로 올해 미대 대학원을 졸업한 M씨를 뺄 수 없을 것이다. 그간 열심히 작품 활동에 매진한 덕에 전북도립미술관에서 지원해주는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곧 스튜디오 공간을 배정받고 내년에는 특별전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모든 이야기는 아쉽게도 상상 속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생각만 해도 기분이 푸근해지는 기분 좋은 상상이라고 할 수 있고, 손만 뻗치면 잡을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상상이기 때문에 조바심조차 난다. 벌써 실현되는 건 아닐까? 도립미술관의 개막전시에 보여준 전북도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반추해 본다면 벌써 이런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실제 상황일 수 있다. 그러나 즐거운 상상은 여기까지다. 전북도립미술관의 개막전은 열렸지만, 아직 공공미술관으로 정식 론칭되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한 데가 많기 때문이다. 위의 상상 속에 언급된 미술관의 사회 교육 활동은 전북도립미술관의 계획안에는 있을지 모르지만 실재로는 벌어지지도 않았고, 그 실현도 아직 멀게만 느껴진다. 최소한 ‘도립미술관’이라면 내년 1년간의 전시계획과 교육 프로그램이 지금쯤에는 공지가 되어야 하지만,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면 ‘계획 중’이라는 문구 외에 별다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상태가 이 정도니 청년작가 창작지원 같은 본격적인 공공미술관 활동은 먼 미래의 것이 될 것 같다. 전북도립미술관도 지역민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또 하나의 ‘한국형 국공립미술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을 말한다면 너무 성급한 판단일까. 지금 여기는 새롭게 출발한 전북도립미술관에 덕담 같은 축복의 말을 전하는 자리이지만, 미술계의 현실이 너무나 어둡기 때문에 축하의 말이 입안에만 맴돌 뿐 쉽사리 터져 나오지 않는다. 과연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국공립미술관이 있는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전북도립미술관도 그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고 또 다른 미술관이 될 것 같다는 패배주의적 생각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찾아온다. 나쁜 예언이지만, 이변이 없는 한 전북도립미술관에 대해 파격적인 재정 지원이나 인력확충은 분명히 없을 것이다. 만들어 놓았으니 유지는 하겠지만, 기본 유지 이상은 힘들 것이다. 현재 전시 운영팀은 전시 외에 미술관 교육프로그램에 어린이미술교실, 주말예술행사, 창작지원프로그램 등을 꿈꾸며 영향력 있는 종합미술관으로 발돋움하고 싶겠지만, 밖에서 어떤 지원을 받아 그 꿈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것을 빨리 깨닫기 바란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주무부처에서 도와주려해도 재정배정의 우선순위에서 문화예술은 맨 뒤라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쉽지 않을 것이다. 서글픈 이야기이지만, 이 나라는 정부 부처 내에 박물관과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어도 예술계가 공식적인 비판도 내놓지 않는 나라아닌가.(11월10일 발표된 문화관광부 직제개편에서 우리나라의 미술관 정책을 관장하는 도서관박물관과가 없어졌다.) 앞으로 전북도립미술관 운영팀이 부딪치는 가장 큰 벽은 예산이나 인력부족이 아니라 예술을 통한 정서 함양을 아직은 사치라고 생각하는 국민 분위기이다. 결국 이런 생각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종래 바꿔 놓겠다는 다부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조건이 어렵더라도 전시 및 운영 수준만큼은 절대로 낮춰서는 안 된다. 공공기관이 한번 권위를 실추하면 만회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며 최고가 되려는 노력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 개막전 <엄뫼모악전>은 절반의 성공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제 3, 4 전시실은 주제의식과 형식의 밀도가 높았으나, 설치가 위주로 된 제 5 전시실의 디스플레이는 메시지를 읽어내기 어려웠다. 전시장 밖의 이런저런 설치작업도 격조 있는 내부 전시 분위기를 도리어 감소시켰다. 근사한 도록과 전시운영은 신뢰감을 심어주기 충분했지만, 공공미술관은 전시만 하는 게 아니라 연구, 홍보, 수집, 보존의 여러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직은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하다는 점은 애써 내가 지적하지 않아도 잘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부족한 예산이나 인력, 나아가 예술을 삶과 멀리 동떨어진 것으로 보는 국민 정서 속에서 지금 운영팀은 어렵더라도 해낼 수 있는 있는 최고의 목표치를 세우고 그것으로 매진해야 한다. 지난 20일 국립현대미술관에 열린 공공미술관의 운영과제에 대한 심포지엄에서 미술관이 ‘대중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엘리트적이어야 하는가’하는 논의가 있었다. 나는 후자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공공미술관은 누가 뭐래도 현실을 뒤따라가는 곳이 아니다. 그것은 돈벌려는 사설이벤트회사가 알아서 다 한다. 공공미술관은 장기간 비젼을 가지고 현실을 앞서나가고 문제를 우선적으로 제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관람객 수를 자랑스럽게 말하기 보다는 어떤 전시를 어떤 의식으로 준비하고 진행하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하며, 고급 예술 정보를 어떻게 도민에게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전북도민은 도립미술관에 와서 ‘별다섯깨짜리 고급문화’를 체험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며, 바로 이 점이 도립미술관의 진정한 설립 정신일 것이다. 글 서두에서 말한 상상 속의 일들이 멀지 않은 미래에 분명히 실현되리라 확신한다. 양정무 |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런던대학교에서 미술사학과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로 있다. 주요 역서로는 『그리스미술』(나이젤 스피비 원저), 『서양회화사 : 조토에서 세잔까지』(마이클 리비 원저), 『신미술사학』(알란 리스 등 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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