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 | [문화와사람]
'굿판의 꽃'으로 살아왔다네
김선경 문화저널 객원기자(2004-12-09 15:08:24)
꽃잔치가 열렸다. 폐교를 개조해서 쓰고 있는 고창농악전수관은 복도고 교실이고 온통 꽃천지다. 얇은 화선지를 새털처럼 얇게 부벼서 만든 종이꽃. 노랗고 빨갛고 하얀 종이꽃들은 먼지처럼 중량감이 없어,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갈 것 같다. 부슬부슬 날리는 꽃송이들, 저것을 머리에 이면 고깔이 된다. 저 어여쁜 고깔을 이고 굿판에서 추는 춤이 고깔소고춤이다.
“옛날에 굿판을 쫓아댕길라믄 쓸개를 다 빼놓고 댕겨야 한다고 했어. 엄청 하대 받고 식구들한테도 좋은 소리 못 들었제. 이것이 좋은 것이었믄 하대를 받았겄어? 지금도 그 하대하고 천대하는 뿌리가 많이 남아 있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용하(73) 할아버지. 전수관 제자들과 함께 이야기판을 벌이는 중이다. 고창 소고춤의 계보를 잇고 있는 명인이자 농악판에서 알아주는 전국 최고의 대포수. 어려서는 집안 어른들한테 ‘작대기’깨나 맞았단다. 멀쩡한 사내녀석이 굿판만 쫓아다니니 두 손 들고 말릴 법도 한 일. 허나 그 녀석은 기어이 ‘꽃을 받고’ 말았다. 꽃을 받는다는 것은 무등을 타는 것을 이름이다. 동네에서 굿을 칠 때 어깨 위에 무등을 탈 소년을 뽑아 올리는데 “아무나 올리는 게 아니고 재질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올렸”단다. “재주가 없으면 뒤로 넘어가분께. 어깨 위에 서서 소고 들고 채 들고 춤을 추는 것이 보통 일이간디.”
그렇게 소고잽이의 길로 들어선 박용하 할아버지. 고창군 아산면 용장마을에서 났으나 굿의 맛을 본 뒤로는 전국 팔도가 좁다 하고 굿패를 따라 다녔다. 당시 최고의 쇠잽이였던 박성근 선생이 한 동네로 이사오면서부터는 영무장(영광, 고창 무장, 장성)권역을 휘젓고 다니며 농악을 쳤다. 칠월칠석날엔 ‘꽃대림’이라고 하는 풍장굿을 쳤는데 법성포까지 불려가서 굿을 하기가 예사였다.
해방 후 굿의 인기가 시들해지자 여성농악대가 꾸려졌다. 약 선전을 겸해서 굿을 하며 돌아다녔는데, 그것도 점점 별 볼 일이 없어져서 나중에는 돌아올 차비가 없을 정도로 악단이 궁핍해졌다. 징이며 장구며 악기를 팔아 각자 여비를 마련해서 헤어진 뒤, 그 길로 파란만장했던 약장사 굿패는 끝이었다.
박용하 할아버지가 유랑시절 이야기를 풀어내자 옆에서 듣고만 있던 유만종(83) 할아버지가 한마디 던진다. “나는 그냥 동네에서만 협조해서 췄지, 여성농악단 따라다니지는 않았지라.”
그 역시 15살 때 꽃을 받으면서 굿판에 뛰어들었다. 굿으로 유명한 양사동 태생이고, 박용하 할아버지가 양사동에 문굿 치러 갔다가 서로 알게 된 사이. “이 할아버지가 강릉 유씨 양반 집안이라 난전 같은 데 따라다녔다고 하믄 눈치 보이니까 부락에서만 춤을 췄다고 하는디, 순전 거짓말이여. 나랑도 많이 돌아댕겼어.”
그래도 말없이 웃기만 하는 유만종 할아버지. 나중에서야 굿패가 해체될 때 “대막대기 두 개 들고” 나온 이후로 동네에서만 머물게 됐다고 고백한다.
여성농악대가 한 시절을 풍미하기는 했지만 동네 굿판은 대부분 남자들 차지였고, 고창지역은 우도농악의 특성상 소고춤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채상소고춤이 발달한 다른 지역과는 달리 호남우도농악에서는 고깔소고춤이 발달했는데 그 중에서도 고창 고깔소고춤을 최고로 친다. 강모질, 김양술, 허칠성, 강대륙, 강대홍 4형제, 유만종, 정창환, 황재기, 박용하 등 쟁쟁한 명인들이 다 고창 출신이다.
박용하 할아버지는 우도농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매도지’라고 강조한다. 가락에서 가락으로 넘어갈 때 맺어주는 부분을 매도지라고 하는데, 그 매도지에 따라 춤동작이 달라지고 멋이 배어든다는 것이다. 그가 단지 소고춤만 춘 것이 아니라 최고의 장구잽이 쇠잽이를 좇아 이리 저리 떠돌아다닌 이유를 알 법도 하다. 소고란 단지 멋을 부리는 춤이 아니라 가락을 살리고 굿판의 묘미를 살리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것도 옛말, 마음은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고 유만종 할아버지가 장탄식을 한다.
“40대, 50대까지는 그런 대로 노는 것이 괜찮았는디 지금은 원청 나이가 들어논께 첫째로 숨이 가빠서 못 하겄어라. 5,6년 전에는 한 장단에 두 세 바퀴는 돌았는디 지금은 어지럼증이 나서 못하겄어. 나이 앞에 장사 있간디.”
굿으로 유명한 양사동에서도 알아주는 춤이 유만종의 소고춤이다. 양사동은 영무장에서도 ‘굿이 센 마을’로 통했는데, 상쇠나 장구잽이는 사다가 쳤지만 소고잽이 만큼은 마을에서 해결했다고 한다. 그만큼 소고춤을 잘 추는 사람이 많았다는 얘기.
그러나 시절이 바뀌면서 굿판 자체가 사라지고 이들은 그저 시골에서 농사짓는 농군으로만 수십 년을 살아왔다. 이들을 다시 굿판으로 이끌어낸 사람은 고창문화원 이기화 원장이다. 동네마다 농악깨나 하는 사람들이 남아있다는 얘기를 듣고 소집령을 내리자 100명 가까운 촌로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 중에서도 기량이 뛰어난 사람들을 30명 가량 추려서 만든 것이 고창농악단, 1989년의 일이다.
“이기화 원장이 대단한 일을 했제. 그때 불러내지 않았으면 고창 농악은 영영 묻히고 말았을 것이요. 소집령 내렸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박용하 할아버지 말대로 영영 손에서 놓을 줄 알았던 소고를 다시 잡을 수 있게 되자 이들은 나이를 잊고 다시 굿판을 휘저었다. 황규언, 정창환, 박용하, 유만종 등이 주도적인 멤버였고, 1992년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에 양사동의 명인 황규언, 강대홍, 유만종이 초청되면서 고창 고깔 소고춤은 세상에 명함을 내밀었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힘을 얻은 이들은 93년부터 본격적인 전수활동을 시작했다. 이명훈(현 고창농악전수관장)씨는 고향 고창에 굿이 남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와 전수생을 자처했다. 60대, 70대 어른들로 구성된 농악단을 보고 그는 참 놀랐다고 한다. “다른 고장은 대부분 선생님 한 분을 위주로 전수가 되는데, 고창은 모든 파트가 완벽하게 구성돼 있다는 것에 놀랐어요. 심지어는 잡색이나 새납에 이르기까지 파트가 구성돼 있거든요. 그래서 배우기가 너무 좋았고요. 특히 어르신들이 서로 화합하고 배려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른 지방에서는 이미 사라진 문굿이나 풍장굿을 재현할 수 있었던 것도 이렇듯 완벽하게 보존된 파트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상에 알려진 건 늦었지만 고창농악의 참맛은 보는 이마다 인정했다.
고창 고깔소고춤의 3인3색이라면 정창환, 유만종, 박용하를 가리킨다. 우열을 가릴 수는 없지만 유만종 할아버지의 춤이 은근하고 멋들어진 반면 박용하 할아버지는 남성적이면서도 유연한 맛이 있다고 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정창환 선생도 이제 여든 두 살. 다리가 아파서 춤추는 것이 여의치 않지만 이들은 지금도 고창농악보존회의 원로회원으로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고 있다. “선생님들이 워낙 잘하고 계셔서 더 이상 바랄 것은 없지만, 다만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춤은 못 추더라도 옆에 계셔주는 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큰 힘이고 자랑입니다.”
다리가 쑤시고 허리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리다가도 굿판이 있다고 하면 열 일 제치고 나온다는 유만종, 박용하 할아버지. 도저히 셈이 되지 않는 그들의 애정과 젊고 풋풋한 제자들의 호응으로 고창농악은 아귀차게 내실을 다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