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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 | [문화시평]
소리에 실린 몸, 몸에 실린 소리
장광렬 무용평론가(2004-12-09 14:59:52)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인한 예술 장르에서의 크로스오버 작업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그 와중에서 인간의 신체를 매개로 하는 특성을 가진 무용예술은 대단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테크놀로지가 인공적인, 기계적인 장치에 의한 산물이라면 무용은 인간의 몸 그 자체를 매개로 하는, 어떤 면에서 보면 가장 순수한 예술 장르이기 때문이다. 무용 장르의 크로스오버 작업 중 가장 보편적인 형태인 영상과 비디오, 에니메이션 등과의 접목을 통해 실제로 무용예술은 극장 무대에 올랐을 때 인간의 몸에만 의존하는 데서 오는 표현 영역의 한계를 확장하는 성과를 얻고 있다. 현대무용단 사포의 전주세계소리축제 초청작인 <지울 수 없어라>는 무용예술의 크로스오버 작업을 표방한 작품이다. 현대무용단 사포에 소속된 4명의 안무가들은 크로스오버를 위한 파트너로 판소리와 우리 국악기를 골랐다. 몸과 시각적인 요소의 접목 대신 몸과 청각적인 만남을 위한 쏘스를 선택한 셈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 기간 중에 초연을 가진 데 이어 제19회 정기공연 무대에서 다시 공연된 <지울 수 없어라>(11월 13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는 네 명의 안무가들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사이에 모두 4개의 이미지들을 보여주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무용수들이 사선으로 비스듬히 누워있고 판소리 창자인 듯 보이는 남자가 서 있는 프롤로그의 도입부에서부터 무대는 객석의 시선을 장악한다. 수평으로 분할하는 여러 개의 평면적인 구도와 수직으로 구획된 하나의 형상이 보여주는 전체적인 이미지는 간결하면서도 응축된 힘을 발휘했고, 이 장면의 주 이미지는 붉은 색 천에 의해 적절한 타임에 또 한번 시각적으로 변화를 꾀한다. 장면이 바뀌면, 몸으로 만들어진 조형미에 붉은 색 천으로 배색했던 무용수들은 그 천을 뿌리는 동작, ‘심청가’ 한 대목이 불려지는 대목에서는 백색 조명으로 바뀐 상태에서 군무로 무대를 수놓는다. 붉은 색 천을 이용해 빠르게 이동하는 동선과는 차별화된 이 같은 시도는 소리의 고저에 따라 움직임을 다르게 대입시키고, 소리의 높낮이에 따라 시각적인 장면의 감도를 조율하는 연출가(김화숙)의 감각이 빛을 발한 대목이었다. 붉은 색이 주조를 이룬 장면에 이어 변화된 무대는 앞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들이 펼쳐진다. 무대 사이드 윙 쪽에서 손가락만 보여 지도록 한 시도, 검정 의상에 흰색 스타킹을 이용한 무용수들의 치장 등에서 달라진 분위기는 확연하게 감지된다. 그 사이를 솔로 춤이 누비고, 다소 생경하고 지나치게 작위적이란 느낌이 드는 솔로 춤은 중간에 음악의 장단이 바뀌고 악기 군이 달라지면서 분위기도 일신된다. 다시 장면이 바뀌면, 한 여자가 누워있고 다른 한 남자가 선채로 느린 움직임을 보여주고 이어 가야금 산조가 흐르면서 2인무가 펼쳐진다. 갑자기 옆에 걸려 있는 붉은 색 치마가 내동댕이쳐지고 2인무는 더욱 큰 진폭으로 전개된다. 2인무 중간에 한 여자가 등장해 판소리에 맞추어 솔로 춤을 펼친다. 김솔의 솔로 춤은 판소리와 춤의 만남을 표방한 작업답게 그 맛깔이 유별났다. 소리의 맛과 색깔에 따라 움직임이 주는 속도와 몸의 자태가 만들어내는 미감(美感)의 농도가 만만치 않았다. 김솔의 느린 팔의 움직임, 여자 소리와 남자 소리가 만나는 대목에서는 음양의 합일이 감지될 정도로 여운이 길었다. 이어지는 4명의 남성 군무와 1명의 여성 솔로 춤이 만들어내는 5인무 배합은 다채로운 움직임이 특히 볼거리였다. 타악에 맞춘 역동적인 리듬은 앞의 장면들에서 보여 졌던 움직임과 특히 대조를 이루었다. 한쪽 팔을 흔들면서 포인트를 주는 동작, 4명 남성 군무의 역동적인 움직임, 소리에 실린 몸의 난무는 그 자체로 현란했다. 다만 테이블을 이용해 위에서 춤추는 장면에서는 오브제를 활용한 보다 색다른 움직임의 조합이 이루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50분 정도 계속된 <지울 수 없어라>는 ‘소야곡’(세레나데)란 부제가 붙어 있다. 제목에서 느껴지듯 무거운 주제나 복잡한 드라마적 구조가 아닌, 한 편의 시처럼 그저 편안하게 펼쳐지는 장면들을 만나도록 되어있다. 그 과정에서 안무가들은 특히 음악과 몸의 크로스오버를 통한 색다른 이미지 구현을 시도하고 있다. 4개의 장으로 나누어 펼쳐진 이미지들은 각각 사용된 음악 구조에서 어떤 일관된 흐름을 갖고 있다. 판소리 외에도 아쟁과 기타, 대금, 가야금, 구음, 북소리 등 다양한 음악들이 사용됐다. 창자와 고수들의 라이브 연주와 국악기가 중심이 된 녹음음악이 혼용되어 사용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판소리(두 명의 남녀 창자의 소리가 때로는 서로 혼자, 때로는 서로 번갈아 불려졌다)에 더 많은 비중이 실려 있었다. 음악의 흐름을 일관된 톤으로 가져 간 시도는 개개의 장면들이 자칫 산만하게 나열되는 위험성을 견제한 연출가의 의도된 장치로 보였고, 이는 춤이 주가 되면서 소리와 만나는 크로스오버 작업의 의미를 구현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러나 각 장면의 이미지들이 확연하게 차별화가 되었고 따라서 관객들이 그 연결고리를 일목요연하게 감지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오히려 일관된 흐름을 악기 군에 따라 조율하기 보다는 예를 들어 판소리 장르 하나만을 대상으로 각기 다른 장단과 색깔, 질감의 소리를 선곡해 각기 다른 춤과 만나도록 하는 시도가 이어졌다면 크로스오버 작업을 통한 융합의 감흥도 더욱 다양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 동안 춤 공연 작품에서 판소리는 음악의 대용으로 사용된 예가 대부분이었다. 판소리 5대가의 뼈대가 되는 이야기 자체를 소재로 할 경우에, 현대적인 감각의 춤과 무대에 한국적인 색채를 혼용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 춤의 분위기에 따라 음악으로 고저와 완급을 조절할 필요가 있을 때 이를 음악으로 대체하려 할 경우에 판소리는 종종 춤 작품의 배경음악 또는 효과 음악으로 배열되곤 했었다. 사포 현대무용단의 이번 작업은 판소리를 사용한 대목에서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되었다. 판소리의 장단이나 소리의 분위기, 전체적인 색조에 따라 춤의 구성과 이미지가 달라지도록 한, 단순히 배경음악의 기능에 머물지 않고 이를 이미지 만들기를 통해 관객들의 감흥을 자극할 수 있도록 계산된 편성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했다. 또한 오랜 만에 만난 현대무용단 사포 단원들의 춤 기량은 성장의 결과가 확연하게 드러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그러나 크로스오버 작업을 표방한 작업답게 이번 공연은 음악과 움직임, 소리와 몸의 만남이 보다 더 세밀하게 조율될 필요가 있다. 새로운 시도로만 만족하기에는 현대무용단 사포의 힘은 그 이상이 되기 때문이다. 무용수들이 단순히 국악기, 판소리에 맞추어 움직이기 보다는 음악의 구조를 알고 그 느낌을 몸에 실어 표현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다면 이 작품의 완성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장광렬 | 1958년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정책을 전공하고, 월간 ‘객석’ 편집부장을 지냈다. 현재는 무용평론가로 활동하면서 한국춤정책연구소 소장,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 대표, 외교통상부 공연예술자문위원 등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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