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 | [문화저널]
그 시원하던 여름날의 기억
이동엽 한옥생활체럼관 대표(2004-12-09 14:48:37)
세월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묵묵히 흐르고 있는 전주천을 보고 있노라면 내 어릴 적 영상들이 짧은 필름처럼 머릿속을 스쳐간다. 천이란 물이 흐르는 곳이어서 그 때도 지금도 여전히 흐르고는 있지만 느껴지는 바람이나 기운들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정겨운 추억이 베어있는 한 폭의 수채화 같았던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는 없지만, 한때는 오수가 흘러 물고기도 살 수 없는 폐허의 천으로 전락했었던 전주천을 새로이 복원한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며, 그 의지가 고마울 뿐이다.
어린시절 전주천에 대한 기억은 막내 삼촌으로부터 시작된다.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는 다가동에 있는 할머니 댁에서 자란 지라, 나와는 7년 정도 차이가 나는, 오히려 맏형에 가까운 막내 삼촌과의 추억담이 많다. 친구들하고 어울리고 싶어 억지로 나를 떼어 놓은 삼촌의 뒤를 몰래몰래 따라다니다가 눈에 뜨이면, 삼촌은 여지없이 각시바위 깊은 물속으로 나를 던지시곤 하셨다. 다시는 따라오지 말라는 꾸중을 덧붙여서 말이다.
그게 서러워 울면서 집에 돌아와 할머니께 이르곤 했는데, 그때마다 할머니는 삼촌을 호되게 매질 하셨다. 그때부터 삼촌의 나에 대한 복수가 시작된다. 나를 한쪽 방향으로만 앉힌 채 자전거 뒤에 태우고 길 가상의 방둑으로 떨어뜨린다는 협박을 하는가 하면, 서신동 보트장에 데려가 보트를 태우고 마구 흔드시며 다시는 할머니께 이르지 말라는 당부 아닌 당부도 하셨다. 나에게 더 사나워 지라고 생된장을 먹이셨던 막내 삼촌은 그렇게 내 어린시절 추억 한구석을 메워 주셨다.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는 교동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그 당시에는 유난히 홍수가 잦아 물에 관련된 기억이 많다.
4학년 때인가, 고무신으로 송사리를 한 가득 잡아 집에 가져갔는데, 잡은 것을 모두 놓아주라는 어머니 말씀에 길가에 그냥 뿌린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보시고는 무섭게 야단을 치셨는데, 순간 어린 마음에도 그 송사리들에게 너무나 죄스럽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지금도 민물고기를 즐겨 먹지 않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굽이 흐르는 물, 반짝이는 모래, 달구어진 조약돌이 지천으로 깔린 넓디넓은 천. 교동다리 옆 한쪽 에는 빨래를 삶는 솥들이 즐비하고, 하얀 자갈위엔 누런 광목을 하얗게 바래기 위하여 긴 천을 널어놓고 빨래를 말리던, 장관을 이뤘던 풍경들. 아이들은 발가벗고, 어른들은 옷을 걸친 채 미역을 감으니 뜨거운 날에 그 시원함을 어디에 비할 수 있을까.
바다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그 시절에 전주천은 아이들과 아낙들의 더 없는 놀이터요 낙원 이었다. 매곡교 밑 자갈밭을 무대로 삼은 약장사들의 멋들어진 국악공연을 보기 위해 학교까지 빼먹고 구경 갔던 일. 한벽당 깊은 물을 풀장삼아 수영을 즐기며, 밤이 되면 속살을 드러낸 여인네들을 훔쳐보기 위해 애썼던 일. 대보름이 되면 천변 양쪽에 자갈로 성을 쌓아 성을 무너뜨리는 놀이를 즐기며, 저녁 에는 다리 뺏기 싸움을 벌였던 일.
요즘의 아이들에게도 이렇게 정겹고 훈훈한 추억이 있을까? 연필을 잡는 것보다 컴퓨터 자판기가 더 친숙하고, 친구들과 성 뺏기 놀이를 하는 것보다 컴퓨터와 게임하는 것이 더 즐거운 아이들에게 한벽당의 물이 얼마나 시원하고, 다리 밑의 바람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느끼게 해주고 싶다.
다시 맑아진 전주천이 자연 놀이터로 적극 활용되어 내가 가질 수 있었던 천에 대한 깊은 향수를 우리 아이들에게도 나눠줄 수 있길 바란다.
공무원들의 무사 안일주의로 인해 한벽당을 수영금지구역으로 묶어놓고, 전주천을 방치 하는 것은 자연을 욕되게 하는 일이며 자연을 느끼고 누릴 아이들의 권리마저 빼앗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