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 | [문화저널]
사라져가는 완산 8경의 끝자락
송영상 전북예총 고문(2004-12-09 14:44:24)
50년대의 전북일보를 살펴본다. 재미가 꿀맛이다. 어느 정치인이 말한 바 있는 선거 때면 집안에 쳐 박혀 밖 앗 출입을 삼가 해야 할 연령층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나 젊은 세대들은 코 웃음질칠 세 꼭지의 기사 원문을 옮긴다.
첫 번째, 1955년 7월21일자 밤이면 남녀 혼욕으로 총애 받는 전주천 기사 원문이다.
숨 막히는 더위의 습래로 한결 서늘한 나무 그늘과 밤에 더위를 피하기 위하여 수많은 시민들이 냇가로 혹은 나무 밑을 찾아들고 있는데 하룻밤 전주천을 이용하는 욕객들은 수백 명을 돌파하고 전주천은 해가 지자 이들 욕객들로 북적대고 있는바 이중에는 여성들도 많으며 때로 남녀의 혼합목욕이 무의식중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있는 실정인데 자칫했다가는 웃지 못할 넌센스마저 빚어지지 않을까 염려도 불사하다.
두번째, 1957녀 8월20일자 전주천의 한낮 벌거벗는 목욕 의법조치 기사 원문이다.
전주경찰서에서는 앞으로 주간에 전주천에서 나체로 목욕을 하여 풍기를 문란케 하는 사례가 없도록 단속하여 왔다는데 이를 준수치 않는 시민들이 많음에 비추어 앞으로는 적발되는대로 의법조치 하리라는바 시민들의 협조를 요청하고 있다. 한편 주간의 목욕은 각시바우 부근에서 하여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세번째, 1961년 3월23일자 전주천을 베니스화 추진하겠다는 전주시 당국의 발표이다.
섬진강 상류의 물을 전주천으로 끌어 들이어 전주를 베니스처럼 만들겠다고 상경한 바 있던 이주상 전주시장은 여러 가지 일에 만족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1일 아침 귀임하였다. 만일에 동 섬진강 상류물을 전주천으로 끌어오게만 된다면 비료공장 유치 문제는 물론 시주변의 농작상 필요한 각종의 수리사업도 자동적으로 무난히 해결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때 그 시절을 확실하게 돌아보는 기사이다. 이 무렵의 미역 감는 곳은 주로 현재의 남천교에서 임업시험장 쪽으로 향하는 한길 정도의 물속이었으며 아카시아꽃이 만발한 다가산 밑에서는 다이빙을 즐겼다. 남천교 부근의 밤 목욕은 자연스럽게 여성차지였는데 어린이들 보다는 장년층의 짖 궂은 장난이 극성스러웠다. 머리통이 굽은 손전등(당시에는 덴지로 호칭)을 비추이면 웃통을 벗은 여인네들이 숨죽이며 웅크린다. 이때 여성 욕객들을 향해 자갈을 던지는 일도 없잖아 있었다.
이 무렵의 남천표모(南川標母) 전주천은 사라져가는 완산8경의 끝 자락이었다. 금모래 은모래가 반짝이는 사이사이를 비집고 수줍게 앉은 자갈밭에 흐르는 물살에 일명 파리똥이라고 불리 운 유리로 만든 고기잡이 병 주둥이를 모기장 같은 성근 헝겁으로 감고 된장을 약간 풀어 놓으면 피라미며 모래무지가 꼬리치며 쑥쑥 들어 갔다.
남천교 교량이 가설되기 전이라서 교동과 서학동을 잇는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물살이 센 가운데는 전신주와 같은 굵은 나무 두개를 철사로 꽁꽁 묽어 얹어 건넜던 시절이다. 아치 설겆이를 마친 여인네들이 빨래감을 담은 양푼(당시에는 다라이로 호칭)을 머리로 이고 지푸라기로 묶은 양잿물을 들고 줄줄이 전주천으로 모여 들었다. 낯익은 이웃 아낙네와 나란히 앉아 시어머니 흉을 보면서 쌀값오름세 등등 너스레를 떨었다. 여인네들의 조잘거리는 말소리와 빨래방망이 소리가 장단을 이룬 풍정을 전주천 빨래교향곡인 남천표모로 자랑해 왔다.
전주천과 전주천변의 실로 많은 애환을 다 얘기하려면 서너 달 밤은 꼬박 지세워야 하거늘 세월은 정말 유수처럼 흐르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