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 | [문화저널]
그때 그 물살을 살리고 싶다
이호선 전 전주대 교수(2004-12-09 14:39:48)
지금의 전주천이야 잘 봐줘서 할머니 젖가슴이요 얕잡아 깎자면 먹다 남은 부추전인데 그래도 한때는 벌 나비 넘나들던 ‘전주천 처녀시절’에다 어깨 펴고 힘자랑 하던 청년시절도 있었더란다면 믿어줄 이 얼마나 될까. 천어 잡고 멱 감고 씨름하고 썰매 타며 남녀를 가림 않고 아이 어른 차별 없이 밤이건 낮이건 찾아와서 즐기던 낭만의 춤마당 꿈의 일기장. 어쩌다 큰 홍수라도 나면 제방 끝 1미터 안팎까지 물이 차서 사타구니 간럽히던 때도 있었노란다면 "나도 봤다" 할 사람 몇이나 있을까. 초가집이 통째로 떠내려가는 지붕 위에 닭 돼지 개들이 벌벌 떨며 흘러갔었고 송아지며 황소도 더러 허우적이며 떠내려가기도 했는데, 그게 벌써 6십 년도 더 된 옛날 얘긴데…
그러한 ‘전주천 처녀총각시절’의 백미요 절정은 역시 정월보름(음력)날 밤의 ‘망월 불놀이.’ 흐르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완산동 젊은이들은 백사장 위에, 다가동 젊은이들은 돌자갈 밭에 산더미 같은 모닥불을 피워놓고 어느 편이 더 높이 불꽃 올리느냐로 불꽃(!) 튀는 경쟁을 벌였던 것. 당연히 완산초등 꼬마학생이던 나는 땔감수집의 최전방대원으로 수 일전부터 훔쳐다가 숨겨놓고 뜯어다가 감춰놓고 야밤에 온 시내를 누비듯 했었다. 허름한 판자울타리가 배겨내질 못했고 중국집 입간판은 최고의 호재였는데 친구와 짜고 제집 평상을 들고 나온 충성파는 최고의 공로자. 물론 더러는 들키고 붙잡혀서 치도곤을 치르기도 했지만 꾀돌이었던 나는 별로 실수한 기억이 없다.
그러면서 또 좌우 양쪽 다리(다가교와 완산교)에서 펼쳐지던 ‘다리 밟기 놀이’가 이날 밤의 꽃. 원래는 자기 나이만치를 왕복하자는 건강놀이지 싶은데 거기 장난기와 청춘기가 혼재하면서 비밀한 맞선보기, 알고 속는 데이트도 한몫을 했다. 소녀들이야 호기심이었겠지만 나이 찬 처녀들이 떼로 몰려 하하 호호 엄마 아빠 질러대던 비명은 어쩌면 기다리고 바라던 숨겨진 환호. 사내애들은 그 소리 흥타령 삼아 몸으로 부딪치고 치마끈 잡아끌며 가로 모로 도망치다 제 나이 세기를 잊곤 했었다.
아참, 전주천을 말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곳이 한벽루. 지금은 무식한 자들 탓에 기와 얹은 공중변소 꼴이 됐지만 이곳이야말로 벚나무 둑길과 함께 전주천의 멋과 낭만과 인정이 고이고 넘쳐 향기로 퍼져가던 샘터였다. 학문과 풍류와 서정이 쌓이고 닦이고 이끼 끼던 곡간이기도 했다. 그 누각 밑 절벽에 부서지는 옥류의 물결이 도도할 때 전주의 예술과 풍류와 인정도 풍요로웠건만 이제는 전주천 메마르면서 탐관과 졸부와 위선이 판치는 가난한 먹이도시가 됐다. 아니 그 보다도 넉넉하고 기름지던 인심이 꼬이고 비틀리고 바닥을 치게 됐다. 지금 내 소원은 토사로 덮인 물길에 삽을 넣어 퍼내고 그 물살 살리는 일. 그리고 그 물살 속으로 풍덩 뛰어들고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