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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 | [문화저널]
천변소묘
정창근 소설가(2004-12-09 14:37:27)
전주 시내를 남쪽으로 벗어난 좁은목에서 기지개 켜 일어선 시냇물은 먼저 한벽루에 자락을 펄럭여 한벽옥류(寒碧玉流)라는 전주 팔경의 하나를 일궈놓고, 잠시 숨 돌려 싸전다리(옛 전주교)를 지나면서 또 한 번 몸을 뒤채 표모(漂母)들에게 빨래터를 내줘 그들을 일컬어 서천(西川)표모라는 또 다른 경관을 만들어 내며 유유히 흘러 완산교 밑을 더듬다가 거기에 실꾸리가 모자란다는 심연을 하나 남겼다. 도토리묵과 어은골 앞에 물고기 숨을 곳을 만들어 주고 한숨 돌리며 홀가분하게 흘러가다 떡전거리를 지나 드디어 삼례의 비비낙안(飛飛洛雁)이라는 이름난 전주팔경을 손짓하다 그제야 끝나는, 그 물줄기. 전주 부중을 북에서 남으로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으며, 백제의 완산 문화를 보듬아 안아 키워낸 전주천은, 그 역사 수백 년이 언만, 오늘은 왜 그리 쇠잔한 몰골이 되어 시민들의 가슴에 애상(哀傷)을 남길까. 인구 6만의 전주부. 1937년의 대홍수를 만나 그 시기 전주에서 그래도 다리 꼴을 갖췄다는 전주교, 완산교, 추천교 중, 맨 동쪽의 전주교는 그 엄청난 물살에 떠밀려 완만한 반월형으로 휘어져 버려 그 형체마저 위태롭고 안쓰러웠으나 용케 버텨 해방과 전쟁을 거쳐 지금의 싸전다리로 그 명맥을 넘겨줬다. 그때 쌓아 올린 방천(防川)은 그 큰 물살에 겁을 먹고 허둥지둥 공사를 시작한 게 그 시초였다. 노디라는 사투리로 불리던 징검다리가 지금의 남천교, 매곡교, 서천교, 진북교를 대신했었다. 현재의 다가교는 일제가 지금의 기전학교 터에 세운 그들의 신사(神祀)참배를 유도하기 위해 그 무렵 제일 큰 규모로 세운 오오미야바시(大宮橋)의 후신이다. 일본 사람이 서쪽(물건너 완산동)에 살면 죽는다는 터무니없는 무속(巫俗)에 겁먹어 서쪽을 기피한 때문에 다리 건설에 소극적이었다. 노디 근처에 모여 조잘대며 빨래하는 표모들의 아리따운 정경은 그저 한 폭의 그림이며 어쩌다가 멋쟁이 신사가 위태 위태 노디를 건널 적이면 어느 심술궂은 표모 하나가 빨래방망이로 물장구를 쳐 올려 그 멋쟁이 양복바지쯤을 흠씬 젖게 하면, 그렇잖아도 수많은 아녀자 속을 주눅들어 불안하게 건너던 그 신사는 그마나 홍당무가 돼 어찌할 바 모르고 건너가면 그것을 지켜보던 표모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그게 그 시기 전주천의 멋스러운 정경의 하나였다. 목욕탕이 없는 부중(시중)아녀자들은 여름밤 서천이 낙원이었다. 깜깜한 밤에 왁자지껄 목욕에 기쁜 아녀자들을 훔쳐본다고 어둠 속에서 낄낄거리는 되다만 치한(癡漢)들의 웃음소리도 그리 밉지 만은 않았다. 한 낯 흐름 속에 고깃병 묻고 발가벗은 하동(河童)들의 웃음소리가 햇볕을 튕겨내던 그 평화롭던 모습은 간 데가 없다. 지금은 그 정취 넘치던 전주천은 마징가Z의 놀이터가 돼 버렸다. 모든 것을 콘크리트로 해결하려는 그 사람들의 고정관념이 밉살스럽다. 무슨 생각으로 심었는지 모를 유채의 그 으스스한 잔해를 훑어오는 소소한 바람에 몸이 오싹해진다. 진정 애향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무참하게 전주천을 상처 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난 시절의 그 푸르고 곱고 운치 있던 풍경은 간데가 없다. 그 풍류스런 낭만을 이제, 다시 어디서 찾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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