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 네비게이션


분야별보기

트위터

페이스북

2004.12 | [문화저널]
전주에서 하천을 그리노라
이병천 소설가(2004-12-09 14:32:26)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강이나 하천이 먼저 있었고 도시는 그 나중이었다. 어느 때부터인가는 헤아려볼 수 없지만 까마득한 옛날로부터 전주천이 먼저 흐르고 있었고, 전주는 그 자식처럼 그 다음에 태어났다는 말이다. 만약 냇물이 그곳을 흐르지 않았더라면 전주는 완주 봉동 근처나 아니면 임실 섬진강 어디쯤에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 비하면 산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다가산이며 건지산, 태극산, 완산칠봉 등은 전주라는 도시 형성과정에서 있어도 그만이었고 없어도 상관없었다. 산에 대해서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시가 태동하는데 있어서 강만큼은 중요한 요인이 못되었다는 말이다. 물론 후대에 이르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이나 산성(山城)을 쌓기 위한 지리적인 특수성은 강조됐지만 그게 처음부터 사람들이 모여살기 위한 필수조건은 못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강은 흔히 모성에 비유되고 산은 아버지, 곧 부성에 견주어지곤 한다고 볼 수 있다. 강은 젖줄이었으며 산은 그 젖이 풍부하도록 만드는 힘이었고 노동이었고 땀이었다. 이쯤 되면 독자들은 모악산(母岳山)의 이름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산은 부성에 비유된다고 했는데 어미 모(母) 자가 붙어있으니 말이다. 이 모순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모악산이 품고 있는 전주나 김제지역이 유난히 물이 밭은 데서 연유한다고 할 수 있다. 물을 품고 있는 다른 큰 산이 근처에 따로 없었기에 이 모악산은 자신을 우러러보는 모든 주민들의 의식과 열망 가운데서 저절로 아비이면서 동시에 어미가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모악의 참된 미덕이었다. 전주의 토박이 고로(古老)들은 흔히 전주에 물난리다운 물난리 한번 발생하지 않은 점을 들어 전주(全州)나 완주(完州)의 온전함이나 완전함을 설명하고자 했다. 옛적에는 수해(水害)가 그만큼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물이 그만큼 찔끔거리는 곳이기도 했다. 전주에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음은 역사적으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은 그곳들이 모두 메워져 아파트 숲으로 바뀌고 말았지만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하더라도 전주 인근에 유난히도 방죽이 많았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른바 농도(農道)라서 물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전주분지의 성격상 화재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에 곳곳에 물을 가둬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의 방죽, 당시의 저수지만 오늘날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더라면 전주는 아마 지금쯤은 우리가 아무리 거부하고 싶어도 호수의 도시, 호반의 도시라고 불리고도 남았으리라. 그리하여 필자는 여름 장마철이면 이따금 물이 콸콸 넘치는 전주천이나 삼천을 구경하러 일부러 발걸음을 옮기고, 그 물줄기를 내려다보면서는 아까운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곤 한다. 물지게라도 지고 가서 그걸 담아다가 어딘가에 부려놓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다못해 발이라도 종일 담그고 싶어지고 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 종이배를, 아니 뗏목이라도 만들어 좀 띄우고 싶어진다. 뗏목이라?… 풍성한 수확만이 축제의 근거가 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자면 한 해 농사가 풍년이면 추수감사제가 열리는 게 당연한 이치겠지만 어로(漁撈)나 채집, 수렵의 결과가 시원찮을 때도 사람들은 땅의 귀(鬼)와 하늘의 신(神)에 빌고 또 기원하는 숱한 의식을 통해 풍요의 축제만큼 즐겁고도 신명나는 판을 만들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강원도 정선 등지에 뗏목축제가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하지만, 물이 밭은 지역인데다가 목재 생산량이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는 전주에서도 여름 한철 장마가 지는 틈을 이용해서 한 차례쯤 뗏목축제, 혹은 뗏목 놀이를 벌이는 일도 참으로 가당하고 신선하리라고 본다. 이 축제는 바야흐로 큰물 구경을 빼놓지 않고 즐기는 필자에게 단순히 볼거리를 제공한다거나 사시사철 물이 풍부하게 흐르기를 기원하는 의미만 담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온전하고도 완전한 그늘에 푹 파묻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보수를 숭상하게 된 이 지역 근성을 위정자들이나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나서서 시나브로 차차츰츰 바꿔보려는 원모심려의 차원에서라도 필요할 듯하다. 뗏목축제뿐만이 아니다. 엿장수 각설이타령도 그곳 물가에 자리를 잡아 절겅절겅 흥겨운 가락이 자나 깨나 들려온다면 좋겠고, 옛적처럼 창극도 천변에서 개최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곳 고수부지가 쑥대밭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보장만 있다면 전주난장도 계절마다 한 차례씩 거기에 텄으면 싶다. 여름을 제외한 계절이라면 대형 멀티비전을 거기에 언제나 설치해두고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구경할 수 있어도 신이 나겠다. 그러려면 우선은 무엇보다도 바닥만큼은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물이 흘러야 한다. 만약 물이 충분히 흘러가지 않는다면 미안하지만 거기서 그 무슨 행사가 열리든 결코 참가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자고로 물은 흘러야만 한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이고 밭아버린 하천에서는 상상력도 고갈되기 마련이다. 높은 산악과 깊은 협곡으로 이어진 중국의 지명을 따서 전주 외곽에 남관이란 마을이 있고 멀리로는 관촌이 생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곳들은 이름처럼 산이 깊지 못하여 풍부한 물을 생산해내지는 못하고 있다. 그나마 관촌의 물은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리는 바람에 전주천에 수량을 더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전주천은 항구적으로 겨우 바닥이나 적시며 그렇잖아도 패배주의에 빠져 지내야 하는 전주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을 갈증 나도록 흘러가야만 하는가?… 전주천이 그렇게 늙으신 어머니의 젖가슴처럼 목마르게 흘러가는 상황에서 그 자식인 전주의 문화예술은 마냥 만개하고 풍성하기를 우리가 기대해도 괜찮을 것인가?… 할 수만 있다면 관촌의 물이나 소양천의 물이라도 꾸어다 전주천에 부리고 싶어진다. 마냥 외상으로 꾸어다 쓸 수는 없을 테니까 전주 사람들이 부담하여 일정량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진안 용담의 물이라면 살아있는 맑은 물일 테니까 더욱 좋으리라. 그것도 아니라면 전주천 상류와 하류에 각각 물을 가둘 수 있는 대형 보(堡)를 만들어두고 지하에 수로를 묻어두고 밤낮으로 물레방앗간의 물처럼 되풀이해서라도 흐르게 만들었으면 한다. 달빛이 비치는 밤이면 필자가 거기 물가에 나가 굽은 팔다리라도 펴고 접으면서 우들우들 춤을 추리라. 옛날 중국 당나라 장안의 교외에 하천이 흘렀는데 그 작은 냇가에는 버드나무가 많았다. 연인들은 흔히 그곳에 와서 길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거나 이별의 아픔을 나누곤 했는데 헤어질 때마다 버들잎을 따서 주곤 했다. 오늘날 우리가 읽는 절창의 당시(唐詩) 가운데 버드나무 어쩌고 버들잎 어쩌고 하는 시들은 모두 거기서 연유한다. 지금은 서안(西安)으로 바뀐 장안을 필자가 찾았을 때 냇물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물줄기가 메말라 있었다. 오늘날은 거기 서안지방에서 장안 시대만큼의 절편들이 창작되지 않음이 무엇 때문인지 헤아리겠는가? 이병천 | 1956년 전주에서 태어나 전북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우리의 숲에 놓인 몇 개의 덫에 관한 확인」이, 198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더듬이의 혼」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저서로는 단편집 『사냥』, 중편집 『모래내 모래톱』, 장편소설 『마지막 조선검 은명기(전3권)』, 『저기 저 까마귀떼』, 어른을 위한 동화 「세상이 앉은 의자」등이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