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2 | [문화가 정보]
상처의 땅, 부안을 노래하다
최정학 기자(2004-12-09 14:26:35)
“혹독한 환경 때문에 우리가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시베리아나 사막조차도, 그곳에서 태어난 사람에게는 언제나 마음속에 돌아가고 싶은 ‘고향’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아름다운 고향 부안에 현대 인류문명이 개발한 재앙, 핵시설이 들어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눈앞에 황금만 보고, 바로 뒤의 재앙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당대에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외투도 입지 않고 단상에 나선 고은(72) 시인의 인사말은 단호했다.
초겨울의 매서운 바람에 빗방울까지 흩날리던 지난 11월 13일, 고기잡이배들이 빼곡히 들어찬 격포항에 문학인들과 부안군민들이 모였다. 상생·평화·공존을 위한 문학축전 2004의 일환으로 열린 제 3회 부안 문학축전. 지난 10월 17일 임진각 망배단을 시작으로, 10월 30일에는 경기 화성군 매향리에서 상처받은 땅을 어루만져온 한국문학평화포럼(회장 고은)이 이번에는 핵폐기물처리장(이하 방폐장)문제로 고통받아온 부안을 보듬기 위해 나선 자리다.
예정보다 30여분이 늦은 오후 3시 30분, 고은 시인을 비롯해 문정현 신부·김인경 교무·김종성 집행위원장·권만금 매향리 대책위원장 등과 부안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는 시작되었다.
‘시도 읽고 노래도 하는 자그마한 잔치’로 이루어진 이날 행사에서 고은 시인에 이어 단상에 오른 소설가 송영(65)씨는 “문학은 그 자체의 존재이유부터 신랄하게 질문해봐야 하는 시점에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의 시, 소설이 오늘 같은 상황에서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해낼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합니다”며 문학인들이 부안에 온 이유를 “문학이 시대적 상황 앞에서 무슨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구하러 온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가장 추운 날씨라는 매서운 비바람 속에서도 행사장을 찾은 부안 군민들은 행사가 진행되는 3시간여 동안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 문학인들의 일갈이 이어질 때마다 부안 군민들은 든든한 동지들을 만난 것처럼 박수를 아끼지 않았고, 문학축전의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하지만 한편에선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들도 터져 나왔다.
“지금 도지사가 이미 자체적으로 끝난 주민투표를 다시 한다고 하고 있어요. 전경도 나가고 긴장상태는 어느 정도 완화됐지만, 아직 방폐장 문제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정부에서도 아직 백지화 선언을 하지 않은 상태구요.” 행사장을 지키던 어느 부안 군민은 목소리를 높였다. “부안은 농어업과 관광으로 먹고 사는데, 이렇게 물 좋고 산 좋은 곳에 왜 핵폐기장을 지으려는지 모르겠어요. 핵폐기장이 들어와 봐요. 누가 이곳에서 재배한 쌀을 먹고, 누가 이곳에서 나온 해산물 먹으러 오겠어요. 저 같아도 당장 떠날꺼에요. 부안 발전 안 시켜도 좋으니까, 그냥 이대로 살게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추운 날 비까지 맞아가면서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입니까.” 일용직으로 일하다가 방폐장 문제가 불거진 뒤로는 거의 생계를 돌보지 못했다는 그는, 많은 주민들의 생계가 지금 거의 황폐화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이날 2부 무대에 올라 이등병의 편지를 부른 가수 김현성(43)씨의 걱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올해에만 두 번째로 부안을 찾았다는 그는 “어떤 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주민들 간에 갈등의 골이 패여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아프다. 반대를 했던 사람이나 찬성을 했던 사람이나 다 같은 동네 사람들인데, 한 바탕 잔치라도 열어 이들이 다시 웃고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마음을 전했다.
이날 문학축전에서는 정양 시인과 박형진 시인 등 우리지역 시인들을 비롯해 정희성, 김창완 시인 등이 평화시를 낭송 했으며, 손현숙, 김동현, 김연, 박영희 등이 공연무대에 섰다.
상처받은 땅을 보듬아 가고 있는 문학축전은 부안에 이어 강원도 태백과 청호동, 경기도 평택으로 이어진다.
| 최정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