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 | [삶이담긴 옷이야기]
삶이담긴 옷이야기
최미현-퍠션디자이너(2004-11-09 14:54:46)
앞치마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1982년 여름이었을 것 같다. 낮잠을 곤히 자고 있는데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동생이 허겁지겁 방으로 들어오더니 “언니 일어나, 전쟁 났데” 한다. 그럴리가 하고 더 자는데 사이렌 소리도 계속 울리고 오빠도 다급한 목소리로 “북한의 공습이란다”고 한다. 그 순간 벌떡 일어난 나는 지갑을 들고 밖으로 달려갔다.
쨍하니 여름 볕이 내려 쪼이는 하얀 골목길에는 이상하게 아무도 없어서 공포감이 들었다. 다들 어디를 갔을까, 쌀집으로 달려간 나는 쌀 한말을 사서 돌아오는데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부조화의 순간이 있을 까, 전쟁이 난다고 나는 쌀을 사서 오는데 우아하게 쇼팽의 피아노 왈츠라니. 내 그림자는 쌀 포대까지 더해져 흔들리고. ‘저 애는 폭탄이 떨어져도 피아노만 치려나. 혹시 저것도 공포감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인가, 아니야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은 모를 거야.’ 골목을 타고 흐르는 것만 같던 왈츠는 너무 경쾌하고 아름다웠다. 그날 우리 셋이 달려 나가 사온 물건을 보자면 라면, 각종 통조림, 쌀 한말, 담배 한 보루이다. 분단국가에 살던 20대의 세 젊은이는 겨우 이렇게 북한의 공습에 대비했던 것이다. 그때 슈퍼마켓의 물건이 동나고 서울 톨게이트가 마비되었었다고 했다.
몇 년 뒤 나는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통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아래층에 살던 폴란드 할머니는 큰 아이는 손을 잡고 작은아이는 유모차에 태워 며칠을 걸어서 왔다고 했다. 그때까지도 가끔 전쟁 꿈을 꾼다는 할머니의 독일에서의 삶은 두 아들과 함께 고단한 것이었다. 한번은 동네 맥주 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보았는데 형편없는 솜씨였지만 본인은 무척 행복해했다. 내가 쇼팽의 피아노곡들을 모은 CD를 선물하려 했지만 CD플레이어도 없고 귀도 잘 들리지 않는다고 굳이 거절했다. 그 CD는 지금도 내가 간직하고 있는데 먼 길을 운전하고 갈 때 한번씩 듣고는 한다.
일년 내 아침 7시 반 정도면 물걸레로 층계를 청소하고 월, 수요일은 창문을 닦던 그 할머니의 앞치마는 무늬가 지워져 안보일 정도로 낡은 것이었다. 마치 ‘나 지금 일해’ 하는 상징처럼 보였었다. 원래 앞치마는 일할 때 입던 옷은 아니었고 아마도 가장 원초적인 의상의 형태 중 하나일 것이다. 이집트 상류층 남성들이 입던 것이 에이프런 형태로 이것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16세기 무렵부터 유럽에서 여성들의 의상에 장식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크게 부풀린 의상에 작고 레이스가 가득달린 앞치마를 둘렀다. 어떤 것은 둘레에 진주나 다이어먼드로 장식을 하기도 했다. 또 서민여성들은 늘 스커트 위에 앞치마를 덧입었다. 일과 생활이 분리되던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늘 일할 수 있는 차림이어야만 했었다. 마리앙트와네뜨가 입었던 앞치마는 레이스, 리본, 생화, 조화, 진주로 장식된 화려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녀의 사치가 얼마만할 것이었는지 짐작할 수 없지만 임진왜란 당시 앞치마에 돌을 담아 옮기던 한국 여인들 같은 비장함은 전혀 없다.
요즘 도서관에서 사서들이 앞치마를 입고 있는 것을 본다. 책을 나르거나 서가에서 일할 때 옷을 상하지 않게 하기도 할 것이고 , 권위적이지 않고 단정하면서 성실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준비가 된 것 같고 도서관 분위기도 한결 부드러워 보였다. 일본영화 러브레터에서도 여자 주인공이 빨간 에이프런을 두르고 도서관에서 일하는 장면이 있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의 모습만큼 보기 좋은 것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햐렉 할머니 극락왕생하시고 세세생생에 전쟁이 없고 차별도 없는 곳에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