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 | [교사일기]
태곤아!내려가면 안돼
송해진-자립형 상산고등학교 국어교사(2004-11-09 14:50:59)
태곤아!내려가면 안돼
원광대학교 대학원 수업을 마치고 야간 수업을 위해서 학교로 차를 몰아오는 중이었다. 몹시 지쳐있어서 음악으로라도 위로를 받아야 했기에 라디오를 켰다. 경쾌한 음악이 차바퀴의 회전 속도만큼이나 빠르고 신나서 볼륨을 높여 듣던 중이었다. 휴대전화의 작은 울림소리가 용케도 청각을 자극했다. 휴대전화 액정화면에 뜬 ‘김태곤’. 이름 석 자가 경쾌한 음악보다도 피로감을 더욱 잘 해소해 주는 것 같았다.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저 태곤인데요” 그 목소리 여전했다. 태곤이는 늘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을 했었다. “선생님 한 번 찾아뵙고 싶은데요, 언제 가능하신지요…….” “반갑다. 근데 무슨 일이 있는 거냐?” “아니오 그냥 선생님 한 번 뵙고 싶어서요” “어쨌든 반갑다. 태곤이는 언제 시간이 가능한데?” “저는 아무 때나 좋아요. 선생님은 언제 시간이 되세요?” “오늘 저녁 어떠냐. 7시까지 학교로 와라”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전주로 오는 내내 태곤의 고등학교적 모습이 차바퀴의 회전 속도보다 더 빨리 지나갔다.
태곤이가 고등학교 1학년때 내가 담임을 맡았다. 성적도 학급 석차 5등으로 우수한 편이었다. 교우 관계도 참 좋았다. 소풍을 가거나 토요일 등산을 가면 늘 가방 한 가득 김밥과 음료수 등을 싸와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을 줄 아는 인정이 많은 학생이었다. 또 학급 일에도 열성적이어서 나는 태곤에 대해서 참 고마워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던 녀석이 1학기 기말고사를 며칠 앞두고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집에 전화를 했더니 어머니께서 태곤이가 아프다고만 말씀하시고 다음날은 학교에 꼭 보내겠다는 다짐조의 말씀과 함께 전화를 끊으셨다. 그런데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태곤이의 결석은 계속되었다. 태곤이에게는 위염이 있었음으로 나는 태곤이가 많이 아프구나 생각을 할 뿐이었다.
태곤의 등교는 시험 첫 날, 1교시에 임박하여 어머니와 함께 이루어졌다. 시험이 끝나고 태곤과 말을 나누기로 하고 일단 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시험을 마치고 태곤이가 교무실로 찾아왔다. 다 나은 줄 알았던 태곤의 모습은 아직도 많이 아파보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몸조리 잘 하라는 말로 일단 상담을 마치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다음날, 태곤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태곤이의 집에 전화를 했을 때 어머니의 목소리는 눈물로 젖어 있었다. 태곤이가 학교에 가기 싫어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곤이가 학교에 오기 싫어하는 이유가 불분명했다. 보통 아이들이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경우는 성적 문제, 친구 문제 등이라고 생각했다. 교단에 선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는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가정방문을 할 때마다 태곤이는 없었고 어머니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오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여름 방학 때까지 태곤은 학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태곤이 하나에게만 매달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방학이니 태곤이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는 짧은 부탁을 하고 일단 방학에 들어갔다.
2학기가 시작되었다. 태곤이 당연히 학교에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실에 들어갔다. 태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태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느낀 나는 태곤에게 뭔가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했다. 그렇게 나의 2학기는 태곤이와의 싸움으로 시작되었다. 일주일 정도 태곤이와 만남을 시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태곤은 좀처럼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곤이 나를 싫어해서 만나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았다. 그런 시도를 계속하기를 보름쯤. 직접 태곤의 집을 말없이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태곤의 집을 찾았다. 태곤은 없었다. 허탕만 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도 태곤을 만나기 위해서 태곤의 집에 갔지만 또 허탕이었다. 한 일주일쯤 계속하였다. 결국 집 앞에서 태곤을 마주하게 되었다. 어머니와 함께 어디를 다녀오는 중이었다. 태곤의 얼굴은 여름방학 전보다 조금 좋아진 것처럼 보였다. 일단 안심이 되었다. 잘 되어 가는구나 생각이 들었다. 태곤이는 어머니와 ‘정혜사’라는 절에서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중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우리는 무려 3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거의 3시간을 듣기만 했다. 태곤의 고민은 무서웠다. 극단적인 허무감이 머릿속에 가득한 상태였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조차 상실한 상태였다. 참 난감한 문제였다. 무언가를 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 자신의 모습에서 비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교사로서의 회의를 처음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태곤이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이 더 큰 문제가 되어 버렸다. 양곤마(兩困馬)의 형세였다.
학교에 출근하여서도 힘이 하나도 없었다. 태곤으로 인하여 나 자신의 삶도 무질서하고 무기력하게 되어서 태곤이가 밉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눈 딱 감고 태곤을 자퇴시키고 빨리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때마다 태곤의 어머니가 전화를 하거나 직접 방문하여 태곤의 치료 방법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틀이 멀다하고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었다. 어머니의 말씀의 핵심은 단 한가지였다. 절대 자퇴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머니께 나의 사심(邪心)을 들킨 듯하여 나는 더욱 힘들었다. 어머니마저도 미워지기 시작하였다. 어머니께는 희망적인 말만 계속할 뿐이었고, 어머니 또한 선생님만 믿는다는 말만 계속할 뿐이었다. ‘선생님만 믿는다’는 말이 어머니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표현으로 생각이 될 정도였다.
상황은 쉽게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수업일수 관계로 태곤은 이제 제적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다. 마치 나의 제적 위기처럼 가슴이 답답해오고 있었다. 어머니께는 차마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이제 태곤이가 열흘만 더 결석하면 제적 처리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답답했던 토요일. 수업 중에 교실 창문 멀리 보이는 모악산을 보게 되었다. 오후에 모악산에 오르기로 결심을 했다. 순간 태곤을 데리고 가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례를 마치고 태곤의 집으로 가서 태곤을 거의 끌다시피 하여 차에 태우고 나왔다. 마치 태곤이 나오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은 기분으로 말이다. 중인리로 가는 차 안에서 태곤과의 대화는 없었고 폭풍전야처럼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악산 등반 처음 얼마간도 마찬가지였다. 금곡사 부근 약수터에서 물을 마시면서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너를 자퇴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너를 자퇴시키는 것은 나의 교사생활 자퇴와 같다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오늘 이 등산은 너와 나의 관계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음을 전제로 내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다. 지금이라도 오르기 싫으면 내려가도 좋다.”
나의 최후통첩이었다. 태곤에게라기 보다는 내가 나에게 보내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묵묵히 산을 오르고 있었지만 나의 신경은 온통 태곤이의 발자국 소리에 가 있었다. 태곤은 어느덧 내 옆에 있었고 나란히 모악산을 오르게 되었다.
교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곤의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다. 전주대학교 2학기 수시모집 원서에 교사 추천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나를 만나자고 한 것이었다. 흔쾌히 수락했고 격려까지 해 주었다. 그러면서 모악산 등산할 때의 심정을 물어보았다. 태곤이는 “선생님을 자퇴시킬 수 없었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태곤이가 사온 음료수를 마시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전에 태곤으로부터 또 한통의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전주대학교 금융 보험학과에 합격했어요.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