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 | [신귀백의 영화엿보기]
신귀백의 영화엿보기(연인)
신귀백(2004-11-09 13:36:14)
더 이상 孔子는 안 나온다.
고통의 현실에 역사가 답을 준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8억인의 나라』를 읽고 대륙에 집착하던 때,『중국의 붉은 별』에서 장정의 하이라이트인 다 떨어진 쇠줄의 노정교를 건너는 대목을 영화화한다면,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후, 세상은 허무의 극치인 <영웅본색.1986> 같이만 보였다. 그러다 장예모의 <붉은 수수밭.1988>의 찌를 듯한 강렬한 원색과 마주쳤다. 역시 대륙이다, 고 무릎을 쳤었다. 루카치 말대로 정치적으로 옳은 것이 미학적으로도 옳다면서. 닫혀진 나라에 대한 환상이 색채적 탐미주의나 형식주의에 대한 너그러움으로 작용했을 성싶다. 그러나 이제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중국은 3박 4일 패키지 상품이 다양한 땅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 좀 먹고 살 만하니 얘네들이 추진하는 동북공정의 퀴퀴한 프로젝트는 그들이 얼마나 사려 깊지 못한 사유체계를 가지는 나라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역사적 대편(大片), 중국 언어로 블록버스터란다. 장예모의 대편 <연인>은 당나라 말기를 그렸지만 이 영화에서의 시간적 배경은 의미가 없다. 왜? 시대정신이 없으니 말이다. 왕조 말기에 나타나는 혁명 무리 ‘비도문’은 조직과 강령에 따른 자기희생을 강요할 뿐, 그 어떤 혁명의 필연성도 제시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첩보 영화는 결국 멜러로 전향한다. 비도문의 스파이 시각장애인 장쯔이가 두 남자 사이를 지리멸렬하게 줄을 타다가 결국은 젊은 금성무를 택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중국이라 보면 된다. 있을 수 있는 이야기다. <영웅>에서 시스템이라는 대의를 추구했던 그는 이참에 선남선녀의 러브스토리에 초점을 맞춘다. 좋다. 변화하는 중국이니까.
‘한 번 웃으면 성이 기울고, 두 번 웃으면 나라가 기우’는 요녀 메이의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의 기가 막힌 춤 솜씨를 어찌 칭찬하지 않으랴. 역동적 춤사위를 감싸는 인체 또 색채에 탐닉하는 장예모, 당신이 좋다. 당나라 발레에 이어 그 진한 숲의 아름다움 또한 일찍이 보지 못했던 것 아닌가. 초록색 대나무 밭에는 연두색이 잘 어울리고 단풍의 가을엔 갈색이 잘 어울린다. 그야말로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다. 고흐의 해바라기 바탕색이 노랑과 주황 계열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그러나 왜 이리 허전하냐?
보기 좋은 떡일 뿐인데, 불붙는 단풍의 숲을 지나 흰눈 오는 벌판의 싸움 장면에 헐리우드 아이들은 먹기도 좋단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자 한 것은 내셔날 지오그라픽 류의 화면이 아니다. 영어가 튀어나올 듯한 젊은 금성무는 깍은 듯 곱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할 말 다 하는 저 이쁜 장쯔이를 어떻게 봐준단 말인가? 깨달음이 있을 만한 배신과 죽음을 두고 겨우 후회의 감정만 보여주는 메이가 다시 살아날 때, 관객들은 실소를 금치 못한다.(나는 장쯔이 미안할까봐 웃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그 둘은 사람 인 자(字)로 눕는데, 국가라기보다는 ‘개인’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장예모는 마돈나나 브리트니 스피어스 같은 얼굴과 춤을 다 갖춘 엔터테이너가 중국에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관객이 동일시하는 캐릭터 아닌 미장센으로만 관객의 눈을 끌어서는 명품이 못 된다는 것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는 서양인들에게 보여 줄 문화의 복수(複數)성을 장쯔이가 추는 춤의 역동성 속에서 찾으려 했고, 일단 박스오피스에 등극했다. 그렇다. 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천재 감독은 자본과 시장의 학이시습(學而時習)에 성공했지만, 저 옛날 두루말이 그림을 천천히 넘기면서 음미하던 당나라의 시와 그림을 그는 포기한 것이다. 결국 그는 사상이나 인문학의 승리 아닌 사이즈나 색채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하여, 나는 이제 그의 그림에서 더 이상 고졸(古拙)을 기대하지 않는다. 이제 우리의 내면에 각인되었던 대륙에 대한 열망을 정말 역사책 속으로 접어 넣는다. 그가 우리와 비슷한 경험 속에서 존재해왔고 거기서 느끼던 정서의 유대감 같은 것도 함께 거두어들인다. 동북공정과 <연인>을 지켜보며, 나는 함부로 예측한다. 중국에서 더 이상 공자는 나오지 않는다. butgood@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