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1 | [문화저널]
릴레이 연재
오태수-KBS 전주방송 총국장(2004-11-09 13:32:01)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
전주에서의 두 해 째 가을이다. 가을이면 누구나 고향생각이 각별할 테지만 전주에서의 직장생활로 나는 이미 고향에 돌아 와 있어 나름대로는 고향의 서정을 만끽하고 있는 셈이다. 누런 들판 저 멀리 노을 지는 모습에 가슴 시리기도 하고 산자락에서 만나는 구절초의 청초한 모습에 무연이 발걸음을 멈추기도 한다. 엊그제 산촌에서 만난 할머니는 당신께서 수확한 밤이라며 비닐봉지에 잔뜩 담아 준다. 거절을 거듭해도 사람 정이 그런 게 아니라며 까칠한 손으로 한사코 팔목을 붙잡는 바람에 순간 울컥하였다. 다시 찾은 고향엔 아버지도 어머니도 이미 이 세상에 없지만 그런 모습들에서 두 분이 늘 살아 계심을 본다.
두 분에겐 그럴만한 노래가 있었다. 친구들과 만나면 아리랑밖에 더는 흥얼거릴 줄 모르시던 어머니는 어느 날 유향가(유행가)를 배워야겠다며 나훈아의 ‘미워도 한세상 좋아도 한 세상~ ’으로 시작되는 노랫말과 멜로디를 열심히 익혀서는 적절한 기회에 풀어놓곤 하셨다. 아마도 어머니의 한 맺힘과 간절한 바람이 그 가사에 함축되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 노래의 끝이 ‘구름 머무는 고향 땅에서 너와 함께 살리라`~ ’는 안빈낙도(安貧樂道)로 마무리되었고 보면 어머니가 가슴에 품었던 이상향은 신석정의 시구처럼 길 솟는 옥수수 밭에 해가 저무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런 먼 나라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더욱 그랬다. 철도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직업상 떠돌이 생활을 유난히 많이 하신 때문인지 아니면 코흘리개 적 세상을 뜬 생부의 모습이 서럽도록 그리워서였던지 기회가 될 때마다 언제나 ‘유정천리’가 압권이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
눈물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 드네.
1959년 박재홍 선생이 불러 히트하였던 유정천리는 다시 아버지의 입을 통해 처량한 듯 구수한 듯 수시로 리바이벌(?)되었고 결국 내 귀에까지 익숙해 져서 나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따라 부르게 되었으며 군 시절부터는 어느 새 나의 확고한 18번이 되어 버렸다. 노래방이 생기고 나서는 2절까지가 필요하게 되어 이 또한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었다.
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
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 길은 몇 구비냐
유정천리 꽃이 피네 무정천리 눈이 오네.
가사는 전반적으로 처량하고 애절하여 자조적인 느낌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이런 저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는 나의 애창곡 리스트 랭킹에 있어 확고한 0순위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 노래에서 내가 유독 목청을 돋우는 대목은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데다. 현실에서 몸 부대끼며 사는 데까지 살아 보겠지만 언젠가는 그토록 그립던 고향으로 돌아 가 흙과 함께 살겠다는 아버지의 푸념 섞인 간절한 희망이 아들인 내 나름대로의 정서와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제 오십을 훌쩍 넘겨 어느 새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있는 지금의 나로서는 부모와 고향을 생각할 때마다 사무치고 복받쳐 오르는 감정이 예전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음이 당연하다.
아버지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어린 시절부터 어렵게 자수성가해야했던 힘들고 각박한 세상에서의 신세한탄과 현실도피를 아마 유정천리의 이 가사에서 위로 받고 싶어 했을 것이며 그래서 자식에게도 다 풀어놓지 못한 채 가슴 안으로 묻어버린 아버지로서의 좌절과 비애, 회한이 응어리 되어 담겨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한편으로 집 울타리 안의 손바닥만한 정원에 채송화, 맨드라미, 접시꽃, 족두리꽃 등 수십 종의 꽃들을 해마다 거르지 않고 심고 가꿔왔던 아버지는 자신의 어려웠던 일상과 희망을 복합시켜 다분히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생활을 그려왔을 터였고 그래서 그처럼 순박하게, 이기적이거나 사악하지 않고 그저 욕심 없이 살기를 기원하셨을 것이다.
결국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건방지지만 나로서도 가끔씩 행랑채 결혼생활을 떠올리며 평소의 일상에서 행여 욕심 때문에 모든 면에서 분수에 넘칠까 경계하였다.
올 가을이 지나고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나는 고향을 떠나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된다는 일종의 강박감으로 살고 있었고 그리하여 전주에 머무르고 있을 때 나만의 조그만 땅뙈기라도 마련해 두고 싶었다. 한적한 곳의 배산임수를 택하고 싶었지만 노후의 생활 편리성을 무시할 수 없어 여러 곳을 답사하다가 드디어는 익산의 미륵산 아래로 터를 정했다. 당장 집 짓고 밭 일궈서 ‘감자도 심고 수수도 심고’ 싶었지만 아직은 경제적인 것도 시간적인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도 주말이면 부지런히 내 땅을 찾아 진한 땀을 쏟으며 과수를 심고 고추, 옥수수, 상추, 호박 같은 채소를 가꿨다. 치열한 생존경쟁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삶의 여유를 즐기고자 하는 요즘 유럽사회의 다운쉬프트(Downshift)족과는 좀 차이가 있다. 아버지가 꿈꾸어 왔던 이상향을 실천함으로서 아버지가 끝내 못 이룬 꿈을 대신 보상해 드리고자하는 간절함의 실천이었으며 그렇듯 아버지의 유정천리 그 노래 하나로 인하여 아들로서의 삶의 방향이 이미 확실하게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이런 저런 핑계로 노래방 가는 기회도 잦아졌다. 직장에서의 관리자 신분과 어느 새 선배 입장이 되어버린 나이 때문에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은 대개 나보다 젊은 층이 주를 이룬다. 퀘퀘 묵은 노래라고 원망들을 것 같기도 하고 내 감춰진 생각을 들킬 것 같기도 하여 나는 애써 ‘유정천리’를 외면하게 된다. 그래서 대타로 택한 것이 이장희가 부른 빠른 박자의 ‘한잔의 추억’인데 후렴으로 계속되는 ‘마시자~ 한 잔의 술 마셔 버리자~ ’를 발악처럼 쏟아 지르며 몸을 흔들어 대면 그런 대로 왕따는 면할 수 있어 좋았다. 이쯤 되면 나로서는 상당히 망가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힘든 세상사를 잊고자하는 취중추태도 가끔 없지 않으나 내가 마시는 술잔의 절반은 눈물이라고 한 김현승의 시 ‘아버지’가 유정천리를 불렀던 내 아버지의 얼굴과 점철되어 내 폐부를 관통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아버지가 소망했던 이상향으로 아직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아버지의 아들로서의 절규를 그처럼 허공에 내 지르곤 하지만 다만 시간이 걸릴 뿐 언젠가는 결국 유정천리의 종점에 완전하게 가 있을 것만은 틀림이 없다.
오태수 | 195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익산 이리고등학교와 원광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KBS에 입사했다. 6시 내고향, 한국의 미, 한국재발견, 도전 지구탐험대, 체험 삶의 현장, TV문화기행 등을 만들었고, 현재는 KBS 전주방송국 총국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답사기행집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1998, 인화)가 있다.
<나를 키운 세상의 노래>는 이달의 필자가 다음 필자를 추천하면서 바통을 이어갑니다. 이달의 필자인 오태수씨는 국영희씨를 추천했습니다. 국영희씨는 현재 전주 YWCA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